한겨레21 표지이야기

물어뜯어서 끌어내려라

(사진/대책을 논의하는 국민회의 당직자들.)

10월7일 강삼재 신한국당 사무총장의 선공으로 시작된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의 비자금 파문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신한국당은 ‘DJ 비자금 6백7 0억원 보유 의혹’과 ‘20억원+알파설’에 이어 지난 10일에는 ‘10개 기 업의 비자금 제공건’을 터뜨렸다. 뿐만 아니다. 신한국당은 비자금설의 앙꼬가 될 김 총재의 친인척 비자금 문제까지도 터뜨리겠다고 예고하고 있다. 파장이 어디로 얼마만큼 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한가지 신한국당 을 포함한 여권 핵심의 의도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DJ만은 떨어뜨려야 한다'는 데로 모아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신한국, 검찰수사가 목표다

사실 신한국당 안에서도 당 지도부의 강경책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당 지도부는 전혀 동요하는 기미가 없다. 어차피 칼을 빼든 마당 에 다시 집어넣을 수 없다는 얘기만 들린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만큼 도 중에 내릴 수 없다는 비유도 나온다. 당의 한 핵심관계자는 “여기서 후 퇴하면 후보고 당이고 다 죽는다”면서 “이제는 갈 때까지 갈 수밖에 없 다”고 말했다. 이회창 총재의 한 측근은 “비자금 문제는 이제 연말대선 에서 이기고 지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며 “정치 개혁 차원에서 뿌리 를 뽑겠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라고 밝혔다.

신한국당이 ‘갈 때까지’의 목표를 어디로 잡고 있을까. 당장은 김대중 후보에 대한 검찰 수사를 끌어내는 것이 목표인 것으로 보인다. 자신들이 폭로한 ‘DJ 비자금’ 보유에 대한 진실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는 검찰 수 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물론 지금까지 '비자금설' 공세가 DJ를 끌어내리는데 전혀 약효를 발휘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 총재의 지지 율만 끌어내리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신한국당은 여전히 검찰 이 수사를 하면 ‘DJ 비자금설’의 진상이 드러나게 되고 `김 총재 1위' 의 대선판세가 뒤집히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김 총재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대기업 등 10개 기업의 명단을 공개한 것 은 신한국당이 얼마나 DJ를 검찰 수사대에 세우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기업 명단 공개는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재계 특 히 재벌들의 극심한 반발이 있을 것은 뻔하다. 한 재벌의 총수는 폭로 하 루 전에 신한국당 당직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당신들 그래놓고 올 연 말 대선을 치를 줄 아느냐”고 항의했다. 당내에서도 “DJ 흠집내기도 좋 지만 재벌들이 등을 돌리게 해서는 선거 치르기 어렵다”는 불만의 목소 리가 터져나왔다.

기업 명단 공개는 또다른 문제를 안고 있었다. 바로 김 대통령의 92년 대 선자금으로 불똥이 옮겨붙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신한국당이 밝힌 기 업들의 돈 준 시기가 대부분 92년으로, 92년 대선자금이기 때문이다. 국 민회의가 곧 바로 “김 대통령의 92년 대선자금과 이회창 총재의 경선자 금을 밝히라”고 맞불을 놓고 나온 것은 이러한 맥락이다. 이러한 점이 충분히 예상되는데도 이 문제를 건드린 것은 검찰 수사 착수를 위한 단서 를 제공하겠다는 일념에서였다. 비자금 파문을 주도하고 있는 한 의원은 “DJ의 친인척 비자금 보유설을 먼저 터뜨리고 기업명단은 가능하면 공개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검찰 수사를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돈을 준 쪽을 밝혀야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즉, DJ를 검찰 수사대에 세우기 위해서는 다른 것은 희생되더라도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3김청산론 확산 위해선 자해도 불사

(사진/10월12일 DJ비자금 폭로문제를 숙의한 신한국당 중진들. )

이런 점에서 본다면 친인척 비자금 폭로와 검찰 고발은 시간문제인 셈이 다. 신한국당 지도부는 법사위의 국정감사에서 검찰 수사를 최대한 압박 한 뒤 검찰이 미적거릴 경우 증빙자료를 갖춰 김 총재를 검찰에 고발한다 는 방침이다.

신한국당 지도부는 검찰 고발과 함께 DJ의 ‘도덕성’에 대한 공격을 강 화해 결국에는 3김 청산 분위기로 몰고간다는 내부 플랜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강 총장이 11일 의원총회에서 “김대중 총재와 같은 부패정치인 이 21세기 이 나라를 이끌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 라며 김 총재를 ‘부패 정치인’이라고 몰아붙인 데서 신한국당 지도부의 공세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이 총재도 13일 부산 기독교인 모임에서 국 민회의 김 총재의 비자금 의혹제기와 관련해 “인기도 만회를 위한 술책 으로 보는 것은 유감”이라면서 “낡은 정치의 껍질을 깨는 아픔이 있어 야 된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이 총재는 12일 저녁 부산 롯데호텔에서 열린 부산지역 주요 당직자회의에서 “비자금 문제는 불행한 일이지만 한 차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구태정치의 산물”이라고 밝혔다.

신한국당 지도부는 DJ 비자금을 드러냄으로써 김대중 총재를 전, 노씨 등 과 함께 구시대 정치인의 범주로 밀어넣겠다는 생각이다. 이 총재를 지지 하는 한 초선 의원은 “DJ가 노태우씨의 돈을 받은 것뿐 아니라 정계은퇴 하고 난 뒤에도 비자금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문제”라며 “이것이야말로 정치를 통해 재산을 모으는 전형적인 구 정치인의 양태가 아니냐”고 말 했다.

신한국당 지도부가 위험도가 많은 비자금 폭로전을 감행하게 된 것은 이 대로 가다가는 DJ 우세의 대선 판세가 그대로 굳어진다는 판단 때문이었 다. 이쯤에서 뭐가 됐든 대선 판을 뒤집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승부수를 띄웠다는 것이다. 비자금 폭로 직전의 판세는 김대중 총재가 각종 여론조 사에 34%대를 오르락거리면서 대세굳히기에 들어가는 상황이었다. 특히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의 ‘DJP 연합’도 발표만 남겨놓을 정도로 급진전 됐다. 반대로 여권은 민주계 비주류가 서석재 의원을 시작으로 10월 중순 탈당을 계획하는 등 분열이 표면화되기 직전이었다. 신한국당의 한 관계 자는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10월8일 대선 연대를 발표한다는 정보가 입 수돼 폭로를 서두르게 됐다”고 말했다.

국민회의는 일단 폭로전을 중지하자는 유화적인 입장을 보이면서도 내부 적으로는 결사항전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여당의 폭로가 단지 흠집내기 차원의 정치적 공세를 넘어 죽기 살기식의 진검승부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총재는 10일 당 대변인실을 통해 발표한 ‘국민들에게 호소한다’는 성명에서 “신한국당은 정책대결을 통한 공정선거의 분위기 를 망치고 있으며 검찰을 함부로 선거에 도구화하려 하고 있다”고 비난 한 뒤 “신한국당의 부도덕하고 비애국적인 행동을 절제시키고 막을 수 있는 것은 이제 국민의 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신한국당의 공세가 자신 에게 ‘위해’를 가하게 될 경우 ‘국민의 힘’을 동원해서라도 끝까지 대항할 뜻을 내비친 것이다.


김 대통령 연출설 만만찮아

(사진/급진전된 `DJP연합'도 신한국당으로 하여금 비자금 폭로를 서두르는 계기가 됐다. 9월25일 농민민단체 토론회에 나란히 참석한 두 김 총재. )

국민회의는 현재 청와대에 대해서는 김 대통령과 김 총재의 양자회동을 제의하는 등 유화 제스처를 보내는 한편 이 총재를 이번 공세의 주도자로 규정해 공격의 칼날을 벼리는 분리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국민회의는 이 와 관련해 이 총재의 정치자금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등 맞공격을 준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한국당과 국민회의간의 마지막 진검승부의 승패가 어떻게 될지는 현재 로서는 누구도 가늠하기가 어렵다. 다만 선공을 한 신한국당의 감독이 누 구인가에 따라 싸움의 성격과 판도가 달라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다시말 해, 이 싸움을 이회창 총재가 주도하는지 아니면 김 대통령이 주도하는지 가 열쇠라는 것이다.

청와대쪽은 공식적으로는 관련설을 부인하고 있다. 김용태 비서실장과 조 홍래 정무수석 등은 줄곧 “당의 일이라 우리와는 전혀 관계없다. 발표 직전에야 우리도 알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 대통령 연출설도 만만치 않다. 김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인 92년 대선자금으로 불똥이 튀는데도 청와대쪽의 태도는 놀라는 기색하나 없이 ‘태연자약’으로 일관했다. 미리 알거나 사전 조율없이는 나오기 힘든 반응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몇가지 간접적인 증거들도 나오고 있다. 조홍 래 정무수석이 신한국당의 폭로 직전 민정수석실의 핵심관계자와 여러차 례 외부에서 만난 것이나 지난 5일 서석재 의원을 만나 신한국당의 ‘거 사’계획을 내비치면서 자제를 요청한 것 등이 그것이다. 김 대통령이 신 한국당 경선 전에 “김대중 총재는 내가 책임지겠다”고 언급한 것도 모 두 이런 공격을 예고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김 대통령의 개입 정도는 신한국당 비주류의 행동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 에 없는 핵심 사안이 되고 있다.

김종철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23일 제 1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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