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만리재에서

훈령조작, 고교 씨름왕, 신한국당…

92년 9월 평양 8차 남북고위급회담. 양쪽 협상대표단은 남쪽이 요구한 동 진호 선원 송환요구를 둘러싸고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었다. 이산가 족재회라는 1천만 이산가족의 비원을 가로막고 있던 걸림돌이었다. 북쪽 은 이인모 노인만 송환하면 판문점 면회소 설치에 합의하겠다는 것이고 이미 정착해 살고 있는 동진호 선원에 대한 송환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 는 것이었다.

대표단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훈령을 청했다(청훈). 여기서 문제는 꼬이기 시작했다. 대통령에게 전달되는 데 무려 10시간이 걸렸고 청훈에 대한 훈 령이 오는데 10시간이 또 걸렸다. 당시 연락체계는 북쪽상황실과 남쪽상 황실을 잇는 연락체계는 모두 안기부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 사이 대표단 의 대변인이었던 이동복 안기부장특보는 미리 준비해간 예비훈령 가운데 ‘송환요구 철회 불가’ 내용을 대통령의 훈령인 것처럼 속여 정원식 대 표단 단장에게 보고했다. 협상 결과는 결렬이었다. 뒤늦게 도착한 노 대 통령의 훈령은 '송환 철회'였다. 그러나 이미 협상이 결렬된 상태였고 안 기부 연락관계자는 이마저 단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나름 대로 획기적인 업적을 이루려 했고 그것을 이산가족 상봉으로 실현시키고 자 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믿었던 안기부에 발등을 찍혔고 1천만 이산 가족도 필생의 비원을 포기해야 했다.

당시는 14대 대통령선거를 90여일 남겨둔 시점. 권력은 김영삼 민자당 대 통령후보를 중심으로 재편되던 때였고 모든 권력기구가 이른바 정권재창 출을 위해 움직이던 때였다. 이들 권력기구는 정권재창출을 위해선 남북 관계는 계속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따라서 협상은 애초 집권세력의 정략을 위해 결렬될 운명이었던 셈이다. 그후 안기부는 남한 조선노동당 사건을 필두로 ‘북풍’을 주도했다.

그로부터 꼭 5년 뒤. 15대 대선을 60여일 앞둔 시점에서 다시 비슷한 사 건이 재현되고 있다. 재집권을 위해서는 무엇(자해이든 피해이든)이든 할 수 있다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DJ비자금설이 그것이다. 물론 비자금은 어떤 형태의 것이든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신 한국당의 DJ비자금설이 자해와 공갈이라는 험상궂은 지적을 피할 수 없다 고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최근 한 고교 씨름왕이 노상강도를 붙잡았다. 그러나 뒤늦게 그 자신이 노상강도짓을 수차례나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게다가 폭행치사 혐의도 드러났다. 노상강도 사실이 밝혀졌을 때만도 시민들은 운동선수로서 격리 돼 생활하던 그를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폭행치사 혐의가 드러나면서 곱 배기의 배반감과 분노를 표시했다. 익히 알려진 이 사건을 장황하게 소개 한 이유는 특별하지 않다. 순서만 바뀌었을 뿐 폭로자들과 닮은꼴이기 때 문이다. 폭행치사까지 저지른 자가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아는데도) 자신 이 거친 초급단계의 강도를 붙잡고는 표창을 달라고 아우성친다? 이 사회 의 기본적인 가치와 윤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씨름왕에 대해선 “몰랐 기에 망정이지”라고 위안할 수 있었다. 단언컨대 그들은 더 많은 돈을 ‘염출’받았다.

두번째로는 문제제기 방식, 제기된 내용, 그로 인한 파장 때문이다. 헌법 에 의거해 대통령의 이름으로 발동한 입법조처(금융실명제에 관한 대통령 의 긴급명령)가 정략적 무기로 사용화됐으며 이를 통해 획득된 내용을 그 들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했고 폭로내용 또한 과장의 냄새가 역력하다. 또 집권세력의 이해를 위해서는 국민경제는 희생될 수 있다고 공언했다.

이산가족의 비원이 정략적 고려에 따라 짓뭉개졌던 5년 전의 기억이 오버 랩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게다가 그들의 정략이란 게 오지 “DJ는 절 대로 안 된다”는 것이라면 5년전의 행태는 차라리 일관성이나 있었다

곽병찬 한겨레21 편집장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23일 제 1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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