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채칼장수 고세림

(사진/고세림씨는 채칼과 입담으로 `아메리카드림'을 이루었다. 좌판에 모인 미국인들이 그의 채칼솜씨를 신기한듯 바라보고 있다. )

고세림(61). 미국에선 ‘미스터 찹찹’(Mr. Chop Chop)으로 통한다. 아메 리카 대륙을 종횡무진하며 시장 귀퉁이에 좌판을 벌이고 채칼을 팔았다. 어찌나 입심이 세고 재간이 좋은지 미국사람들이 배꼽을 쥐었다. 우리로 치면 장터에서 “애들은 가라!”며 뱀쇼를 보이던 약장수쯤 될까. 그의 세치 혀가 한번 발동을 걸면 까맣고 하얗고 노란 피부의 사람들이 홀린 듯 지갑을 열었다. 그렇게 20년 가까이 팔아치운 채칼이 30만개에 이른다 . 그래놓고는 공치사가 대단하다. “나는 미국사람들을 구했어.”

약장사에게서 산 약을 먹고 효험을 본 사람 있으면 손들어보라. 이 약 한 병이면 신경통에 즉효라거나 위장병에서 발기불능까지 만병통치라는 말을 믿은 것부터가 어리석다. 그러니 한낱 채칼장수가 미국사람들을 구했다고 떠벌리는 건 얼마나 허무맹랑한가. 그러나 그는 정색을 한다. 정말이라는 거다. “미국사람들은 고기는 많이 먹고, 야채는 조금 먹는다니까. 양배 추를 손으로 북북 뜯어 마요네즈에 버무려 먹는 게 고작이라고. 그래서 해마다 수백만명이 고혈압으로 죽어가는 거지. 채칼로 야채를 곱게 썰어 많이 먹게 만든 것이 왜 구원이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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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입담이 쇼로 이어지면 정말 굉장했다. 그가 “다른 사람은 열번 죽 었다 깨어나도 못한다”고 자랑하는 찹찹쇼다. 우선 장바닥에 임시천막이 쳐진다. 벙거지 모자에 하얀 셔츠를 입은 그의 앞에는 회의실 탁자만한 좌판이 놓인다. 좌판 위에는 오이며 호박이며 당근이며 양파 따위의 온갖 야채가 수북하다. 그리고 현란한 채칼 묘기. 일곱가지 칼날을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야채를 앞뒤로 쓱쓱 밀어댄다. 가늘게 굵게 얇게 두껍게. 순식 간에 오이는 꽃으로, 당근은 왕관으로 화려하게 변신한다. 그러면서 이렇 게 외친다. “백 앤 포스. 백 앤 포스. 킵 언 고잉. 백 앤 포스.” 우리 말로 하면 이런 뜻이다. “왔다리 갔다리. 쉬지 말고 왔다리 갔다리.” 그의 영어는 예나 지금이나 제멋대로다. 대개 이런 식이다. “와이프 프 리티 굿 쿠킹 메이크 해피 패밀리, 허즈번드 프리티 굿 쿠킹 메이크 뱃 패밀리”(아내가 음식을 잘하면 가족이 행복하고, 남편이 음식을 잘하면 가족이 불행하다). 관사나 전치사 따위는 과감하게 잘라내고 알짜배기 단 어들로만 토막토막 이어진다. 채칼 파는 데 충분할 정도만 영어를 배우고 그만둔 탓이다. 그러나 몸짓만큼은 연극배우 뺨친다. “산에 가야 범을 잡고 물에 가야 고기를 잡고, 인천 앞바다에 배 한척이 뜨고….” 약장수 처럼 청산유수로 풀어야겠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몸이 고생하는 격이다 . 채칼을 내던지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고, 눈으로 구경꾼들을 쏘아 보고, 그러다 갑자기 말꼬리를 늘였다 자르고. 한판의 걸쭉한 마당극을 방불케 한다. 이쯤되면 그의 말대로 “구경꾼들이 거의 뿅가게 마련이다. ”

애초 채칼은 악연이었다. 사실 미국에 간 것부터가 채칼의 함정에 걸린 것이다. 그 딱한 기억은 연탄을 때던 시절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그는 연탄덮개와 삼발이 석쇠 두꺼비를 하나로 묶은 아이디어 상품을 팔고 있 었다. 백화점 에스컬레이터 옆에 판을 벌이고 예의 그 입담으로 부엌의 필수품을 선전했다. 그때 백화점쪽에서 채칼도 한번 팔아보라고 권했다. 마침 일본에 수출한 게 반품되어 돌아온 게 있다는 거였다. 채칼 하나를 6백원에 팔면 1백원을 받기로 하고 뛰어들었다. 그게 히트를 쳤다. 공장 에서 금형을 다시 꺼내 채칼을 찍어내야 할 정도였으니. 그때 채칼 회사 에서 “당신은 정직원도 아니니 50원만 먹으라”고 협박을 해왔다. 고집 부려봤자 법으로도 지고 돈으로도 지고 주먹으로도 진다는 거였다. 울화 통이 터져 채칼을 직접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그러다 특허침해로 고소에 휘말려 1년 동안 고생을 했다. 미국은 그래서 도피처였다.

50달러와 채칼 다섯개만 달랑 들고 요리사로 유람선에 탔다. 월남전 당시 건설회사 식당에서 콩나물국을 끓여본 게 요리경력의 전부인 그였지만 미 국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하루에 1천5백명분의 스프를 끓이고 퍼주고 하다보니 저녁이면 녹초가 되곤 했다. 결국 한달 만에 미국땅에 내렸다. 그리고 불법체류. 채칼로 망했으니 채칼로 흥하리라 다짐하면서 온갖 설움과 수모를 견뎠다. 경찰서 앞에서의 위기일발은 지금도 아찔하 다. 채칼 팔 욕심으로 앞뒤 재지 않고 차이나타운에 자리를 편 게 화근이 었다. 20층짜리 건물 앞에 자리를 잡고 “백 앤 고우”(그때만 해도 백 앤 포스가 맞다는 것을 몰랐다)를 외치는데 육군 대위로 보이는 사내가 다가오는 거였다. “당신 와이프 이거 할 줄 모르지.” 농을 던졌다. 그 랬더니 사내가 씨익 웃으며 사라지는 게 아닌가. 순간 아차했다. 줄행랑. 건물은 경찰서였고 사내는 경찰서장이었던 것이다.

그의 찹찹쇼는 미국에서도 명물로 떠올랐다. 신문과 방송에서 인터뷰가 쇄도했다. 중학교에 초청돼 쇼를 한 기억은 지금도 흐뭇하다. 점심을 먹 고 쉬고 있는데 한 신사가 다가와 꾸벅 인사를 하더란다. 중학교 교장인 데 학교에 와서 찹찹쇼를 해달라는 거였다. 우리로 치면 가정시간 일일강 사로 초청된 것이다. 학생들 앞에서도 걸쭉한 입담을 뽐냈다. 구멍만 숭 숭 뚫린 미국식 채칼을 쇠의자에 내동댕이치며 호통을 쳤다. “이거 봐. 칼날에 녹이 슬었지. 너희들 손도 이렇게 녹슬게 하지 마라. 손이 녹슬면 머리도 녹슬어. 그러나 찹찹하면 손에 녹 안 슨다.” 그랬더니 교실이 찬 물을 끼얹은 듯 숙연해지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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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미국의 주부들에겐 ‘허즈번드 킬러’라고 호통친다. “당신들은 다 남편잡는 여자들이야. 음식에 고기 많지 달걀 많지 버터 많지. 남편이 그 렇게 콜레스테롤 덩어리를 먹는데 배겨나겠어.” 그러면서 스스로를 ‘콜 레스테롤 킬러’라고 불렀다. “내가 콜레스테롤을 잡는 3가지 비결을 알 려주겠으니 잘 들어. 첫째 화내지 마. 둘째 사람 미워하지 마. 셋째 야채 많이 먹어.” 한마디로 채칼 많이 사라는 말이다. 장사수완도 이 정도면 가히 봉이 김선달 수준이다.

그는 평생 외판원의 길을 걸었다. 부모가 4·3사건의 희생양이 된 뒤로 전국을 떠돌며 물건을 팔았다. 제주에서 다방 차 끓이는 심부름꾼, 식당 보조로 일한 게 월급쟁이 경력의 전부다. 진해로 나가서는 담배를 팔았고 , 서울로 올라와서는 감독 시나리오작가 영화배우 등을 상대로 책을 팔기 도 했다. 학교라곤 중학교 문턱을 밟아본 게 고작이다. 그러나 사는 공부 는 제대로 했다고 자부한다. 그 긴 외판원 인생에서 가장 값진 걸 깨쳤다 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해도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면 대접받을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이다. “풀빵을 굽는 게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남보다 다르게 풀빵을 굽지 못하는 게 부끄러운 것이여.” 3년 전 미국에선 팔 만큼 팔 았다고 판단해 한국에 돌아온 채칼장수 고세림의 호통이다.

사진 이종찬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04일 제 1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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