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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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탈퇴서 작성을 거부하고 수배를 택한 고려대 경영대 학생회장 김기욱씨. 올바른 변화가 학생운동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감옥 안에서 탈퇴서를 쓰는 대의원들도 많다는 얘길 듣고 무척 망설였 어요. 저런 사람들도 쓰는데 나 같은 사람이 뭘 믿고 끝까지 견디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려대 경영대 학생회장 김기욱(25)씨는 한총련 대의원이다. 공안당국이 정한 탈퇴시한인 7월31일까지 탈퇴서를 쓰지 않아 그는 지금 수배상태다. 그러나 김씨는 아직 탈퇴서를 쓸 생각이 없다. 탈퇴서가 해결해주는 문제 는 하나도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난 7월20일에는 집으로 검찰의 출두명령이 떨어졌다. 담당검사가 전화 로 어머니에게 “아드님의 장래에 대해 심도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에게 검사는 “아무 것도 아니다. 탈퇴서 한장 쓰면 된다. 안 쓰면 무조건 잡혀가고 빨간줄 가고 취직도 안 된다”고 했다. 어머니 는 아들에게 “아직도 늦지 않은 것 같다”고 애원하지만 검사의 '협박' 때문에 김씨의 생각은 오히려 더 굳어졌다.
“처음에는 걱정도 많이 했어요. 운동역량이 부족한 경영대에서 제가 빠 지면 어떻게 하나. 그냥 탈퇴서 써주고 후배들을 챙기는 게 더 낫지 아닐 까.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탈퇴서 작성 여부로 구속 불구속 을 결정하는 공안당국이 진정으로 학생운동의 개혁이나 개선을 바라는 건 아니라는 확신이 생겼어요.”
그는 물론 한총련에도 문제가 있음을 안다. 한총련 주류의 운영방식에도 상당히 비판적이다. “한총련의 과오는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고 잘라 말한다. “과도한 전민항쟁 노선이나 달력식·궐기식 사업방식은 문제가 있어요. 상향식 의사개진은 안 되고 하향식 내리먹이기 사업만 남았다는 얘기도 있어요. 그러나 이 모든 문제들은 검찰의 토끼몰이식 와해작전이 아니라 학생들의 자율적인 토론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는 군대까지 갔다온 ‘늦깎이’ 학생회장이다. 평소 말을 잘 하지 않는 다고 해서 집에서는 ‘크렘린’이라 불리지만 학생회장을 하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는 부모님께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밝혔다. 학생운동의 필요성 에 대해 부모님들도 동의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불탈퇴 결정을 부모님 도 결국 이해해주실 거라고 믿고 있다. 오늘도 그는 집에 들어가지 못하 고 학교 어디선가 선잠을 잔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그는 신념 하나 지키 며 사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왜 이렇게 힘든가 하는 생각을 한다. 해외 에 어학연수간 여자친구가 간절하게 보고 싶은 순간이기도 하다. 친구가 돌아오면 “나는 이렇게 내 생각을 지키며 살았다”고 자랑할 작정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든든한 ‘빽’이 많다. “몸조심하세요. 해줄 게 없어요 ”라는 쪽지를 써주는 후배들과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와 밥을 사주는 직 장 다니는 선배들이 바로 그들이다. “탈퇴 여부를 떠나 모든 학생회 간 부들이 한총련의 올바른 변화를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우리는 결국 학생운 동을 지켜낼 수 있을 겁니다.” 한총련에는 현재 탈퇴하지 않은 대의원들 이 4백여명에 이른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04일 제 1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