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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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현대 한국문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난쏘공>의 작가 조세희씨가 `희망'을 화두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55). 그가 90년대를 향해 말 문을 열었다. 그는 최근 창간된 진보적 계간지 <당대비평>의 편집인을 맡 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미완으로 남겨졌던 소설 <하얀 저고리>의 올가을 출간을 목표로 탈고작업에 한창이다. “시대와의 오랜 반목 속에서” 오 직 자신만의 ‘말’을 찾아 수도자처럼 침묵의 뿌리를 내려온 이 과작의 작가가 97년 문득 소설과 매체라는 두 가지 통로로 우리를 향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8월22일 늦더위가 한풀 꺾인 저녁 당대출판사가 자리잡고 있는 홍대 앞 카페촌에서 만난 작가는 이미 반백의 모습이었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비 교적 조용해 보이는 차집에 들어섰을 때 여자 종업원은 우리 두 사람을 정중히 거절했다. ‘꼰대 출입금지’. 다시 몇백미터를 걸어 좀더 노티나 는 카페에 겨우 마주앉을 수 있었지만 감히 음악소리를 줄여달라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인터뷰의 주제는 작가가 <당대비평>의 창간사에서 밝힌 바, ‘무산된 꿈 과 희망의 복원’에 관한 것이었다. 이른바 <난쏘공>의 작가에게도 희망 이 아니라면 인터뷰는 무의미할 것이다.
<난쏘공>이 80년대 내내 젊은이들에게 시대를 읽는 교과서의 하나였을 때 정작 조세희는 자신의 언어를 찾지 못해 침묵했었다. 30여년의 ‘작가’ 생활 동안 단 세권의 작품집을 낸 것이 조세희 문학이력의 전부이다.
조세희는 1942년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23 세 때인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나 “소설가로서의 한계를 느껴” 창작활동을 중단하고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았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체제가 들어서고 개발독재가 절정에 이른 1975년 작가는 10년간 의 침묵 끝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연작을 시작했다. 그는 “무 엇이 되었든 우리에게 칠십년대는 파괴와 거짓희망, 모멸, 폭압의 시대였 다”고 말했다. 그가 한 사람의 작가이기 이전에 시민으로서 “제일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악’이 드러내놓고 ‘선’을 가장하는 것이었다. 악이 자선이 되고 희망이 되고 진실이 되고 또 정의가 되는 것”이었다. 그가 개인적으로 선택의 중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어느 날 경제적 핍박자들이 모여사는 재개발 지역동네에 가 집이 헐리 면 당장 거리에 나앉아야 되는 세입자 가족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고 있는 데 철거반들이 철퇴로 대문과 시멘트담을 쳐부수고 들어왔습니다. 철거반 들과 싸우고 돌아와 작은 노트 한권을 사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최인훈 의 <광장> 등과 더불어 이제는 현대 한국문학의 고전이 돼버린 12개의 연 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이렇게 태어났다.
그러나 1978년 이래 작가는 다시 ‘소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회 의 속에 침잠했다. 그의 문학적 결벽은 70년대의 <난쏘공>에 대응하는 80 년대의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구에 다름아니었다. 그 사이에 소설집 <시 간여행>과 사진에세이집 <침묵의 뿌리>를 드문드문 낳았지만 오랜 침묵을 견디기 위한 신음 같은 것이었다.
이제 그가 거의 20년 만에 진보적 지식인 사회의 공적 커뮤니케이션의 장 에 자신의 발언대를 만들고, 스스로를 얽어맨 네번째의 소설을 토해내고 자 하는 동력은 역시 <난쏘공>의 ‘선택’처럼 “지금도 똑같이 되풀이되 고 있는” 거짓희망에 대한 저항, 그것을 통한 진정한 희망의 복원에 대 한 꿈인 것 같다.
말을 극히 아끼는 작가조차 결국 음악소리에 가끔 톤을 높일 수밖에 없는 우리 대화에 찻집의 손님들은 신기한 시선을 보냈다. 그들은 대부분 서울 특별시 낙원구 행복동에 난쟁이 일가족이 살던 무렵에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거나 아주 어렸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70년대를 나와 80년대를 거 쳐 다다른 90년대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팎이 이어져 있지 않 은가? 날마다 천국을 꿈꾸며 잠들어야 했던 행복동 난쟁이 가족의 무너 진 집터 위에 우리는 앉아 있었다.
-<당대비평>은 어떤 매체입니까.
여러모로 모자란 점이 많은 책입니다. 그러나 몇몇 기획, 예를 들어 ‘한 국을 지배하는 야만’, ‘자유와 평등을 넘어 사회적 연대로’ 같은 특집 들은 이 계간지가 지향하는 성격을 잘 보여줄 것입니다. 90년대는 70년대 와 분명히 다르지만, 폭력과 억압의 형태가 더욱 간교해지고 복합적이라 는 데 문제의식의 초점을 맞추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원합 니다. <당대비평>은 새로운 사고를 통해 진보의 믿음을 전개하는 새로운 사람들을 필자와 독자로 원합니다. 다음호에는 더욱 잘 만들겠습니다.
-곧 나올 <하얀 저고리>를 소개해 주시죠.
이 소설은 다 써놓고 결말부만 남겨둔 채 오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 결 말이 어떠해야 할지를 나 스스로도 고민했고, 문민정부 탄생의 기만성이 결말에 대한 희망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난 쏘공>이 개발독재하의 철거민 노동자가족의 이야기라면, <하얀 저고리>는 광주항쟁을 겪은 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1백20세에 이른 가족의 할머니 는 식민지지배와 분단과 이산, 그리고 개발시대를 거쳐 광주항쟁에 이르 는 세월을 어렵게 견뎌내오다 결국 90년대에 이르러 굶어죽는 북한의 이 야기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며 숨져갑니다. <난쏘공>이 인간의 존엄을 짓 밟은 70년대식 개발독재에 대한 저항이라면, <하얀 저고리>는 우리 근대 사 전체를 일관되게 억눌러온 ‘내부의 적’에 대해 저항하다 희생되는 가족사입니다. 나는 이 소설이 <난쏘공>의 연장선에서 우리 시대를 이야 기하는 소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다시 무산된 꿈과 희망의 복원으로 돌아갔다. 작가는 희망의 좌 절을 90년대 정치의 기만성에 책임을 돌렸다. 구체제와의 결탁으로 탄생 한 ‘문민정부’는 작가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 것은 90년대식의 거짓 희망일 뿐이다. 전두환 노태우체제의 진정한 극복 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나아가 극복의 꿈마저 무력화시켰다. 현혹과 기만 의 세상에 절망한 작가의 눈에 어느 날 프랑스 노동자들의 행진이 들어왔 다. 파리에서 목격한 1세계의 진정한 역동성에 감동한 작가는 그러나 그 감동의 몇배를 서울에서 느꼈다. 올해 초 노동자총파업이 그것이었다.
“나는 야만의 시대가 끝나면 소설 <하얀 저고리>를 마칠 수 있으리라 기 대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는 오지 않았습니다. 작가로서 내가 무엇 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무력감이 다시 나를 붙잡았습니다. 그러다가 노동자총파업에서 나는 어떤 새로운 희망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게다가 북한사회주의의 처절함은 이제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남북이 아니라 전 민족적 차원에서 새로운 반성과 사고를 요구하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 지금이다, 지금이 무언가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될 때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당대비평>의 참여를 거절하지 않았고 <하얀 저고리> 탈고를 결심했습니다. 희망의 복원이 단숨에 가능하진 않겠지요. 그러나 자기 시대에 자기의 언어를 잃어야 했던 사람으로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일 까요?
-선생님은 <난쏘공>의 1백쇄 출간을 기념한 어떤 글에서 “혁명이 필요할 때 우리는 혁명을 겪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라지 못하고 있다. 제3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경험한 그대로, 우리 땅에서도 혁명은 구체제의 작 은 후퇴, 그리고 조그마한 개선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우리는 그것의 목 격자이다”고 말했습니다. 90년대에 혁명이란 단어는 흘러간 유행가인가 요.
우리는 억압하는 체제와 질서를 사회 대다수 구성원의 뜻과 힘으로 전복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비약을 통한 질적 전환을 경험하지 못한 사회라 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나는 90년대가 전시대보다 더 자유롭고 더 민주적이지 않느냐는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의 악 은 더 야비해지고 더 강고해져가고 있습니다. 나는 혁명가가 아닙니다. 피흘리는 혁명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꿈꾸는 혁명은 한 사회가 각성과 용기를 통해 일으키는 궐기의식입니다.
그는 이 말을 하면서 간간이 30대에 대한 애착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이상에 대한 열정을 경험했던 30대가 다시 구세대의 비겁과 새로운 세대 의 무경험에 파괴되지 않고 자신의 이상을 간직한 채 성장해가야 우리 사 회가 좀더 진보를 이룩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기대 탓이었다. 그는 자신 과 같은 세대의 사람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비동시대적 동시대인’간 의 싸움에서 진보의 자리를 넓히는 데 자기의 힘을 보태고 싶어했다. “ 단언컨대 우리에게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변화에 대한 이상이 없는 한 우리에게 21세기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도 물 론 그렇다고 대답했다. 계몽적이라는 말에도 부인하지 않았다. 계몽이 낡 은 공자말씀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계몽적 가치는 유효 하다고 믿는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근대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사랑을 갖지 않는 사람을 벌하기 위해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난쏘공>의 한 귀절이다. 그 믿음은 바로 조세희의 믿음과 다 르지 않다.
“우리 마음속의 분노만으로는 책이 안 되나요? 증오만으로 한권의 책을 만들 수는 없을까요? 오직 통곡만으로 가득 찬 책이 없을까요?”
작가이기 이전에 지식인이기 전에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서 그가 자신의 절망과 희망을 이렇게 스스로에게 되묻고 있을 때, 밤은 이미 깊었다. 창 밖은 여전히 불야성인데.
이인우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04일 제 1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