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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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특별전 `동서명작전'에 출품된 루오 작 <조지>. 휴머니즘에 입각한 기독교적 색채가 강렬한 원색과 단순한 형상 속에 두드러지게 부각된다.)
“지구의 여백… 도대체 무슨 말이지?”
오는 9월1일 막을 올리는 제2회 광주비엔날레(11월27일까지)는 국제적인 미술행사에 걸맞게(?) 전시주제도 다소 생소하다. 흔히 여유나 한가함 따 위로 여겨지는 ‘여백’이 이번 행사에서는 서구 중심의 가치체계와 제도 에 틈을 내는 예술행위의 상징어로 뜻이 바뀌어졌다. 철학적 이미지를 강 하게 풍기는 주제어 자체에서도 느껴지듯 이번 비엔날레는 1회 때보다 심 오하면서도 도전적인 메시지를 숨기고 있다.
‘새 문화지도를 그리자’는 구호로 요약되는 이번 비엔날레는 회화에서 부터 설치작품과 첨단테크놀로지에 이르기까지 현대미술의 복잡한 형식들 이 총망라돼 있다. 그러나 내용은 대체로 서구화의 맹점을 짚는 문명비판 적 성격이 강하다. 핵심은 서구식 현대화에서 비롯된 환경파괴, 성차별, 인종·민족문제, 핵위협 등의 폐해를 걷어내는 데 미술이 한몫하자는 것 이다. 그런 면에서 관객들은 전시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단순한 감상자가 아니라 지구촌의 새 문화질서를 창조하는 작업진의 일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스탄불이나 요하네스버그 등 다른 제3세계 비엔날레들이 ‘ 무역로’나 ‘예술-관객 사이의 소통’ 따위의 지엽적 주제를 벗어나지 못한 데 반해 전지구적 사안으로 주제를 잡은 것은 모험적 시도라는 평이 다.
이영철(41) 광주비엔날레 전시기획실장은 “1회가 제3세계 미술의 단순한 소개장이었다면 2회는 서구작가들의 손으로 서구 주류미술의 등을 때리는 도전적 성격이 강하다”며 “성과에 따라 국제미술계에 반향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전지구적 사안을 주제로 문명비판
본 전시를 이루는 속도, 생성, 혼성, 권력, 공간의 5개 소주제들은 이런 맥락에서 지구촌의 삶과 문화, 사회제도를 규정하고 있는 핵심요소들이다 . 전시전문가인 5명의 커미셔너가 개성적으로 소주제를 해석해 연출하듯 배치한 출품작들은 제도에 의해 통제되는 욕망과 의식을 해방시키려는 의 도를 다양한 이미지들로 표현한다. 5개 소주제를 동양 음양오행의 다섯 요소인 물(水-속도), 불(火-공간), 나무(木-혼성), 쇠(金-권력), 흙(土- 생성)과 연결시킨 것 또한 흥미롭다.
본 전시에는 39개국 작가 1백17명과 8개 단체가 내놓은 3백57점의 출품작 이 선보인다. 출품작가 목록에는 요셉 보이스, 이브 클라인, 존 케이지, 브루스 나우만, 빌 비올라, 신디 셔먼, 루이스 부르주아 등 현대미술의 세계적 대가들도 20여명이나 포함돼 있다. 한국작가로는 올해 베니스비엔 날레 특별상을 수상한 강익중씨와 구정아, 임충섭, 이기봉씨 등 10여명이 참가한다.
먼저 세계적 전시기획자 하랄드 제만(스위스)이 꾸린 ‘속도전’은 ‘빠 른 것이 최고’라는 현대사회의 속도논리의 허상을 꼬집는다. 그런 까닭 에서인지 곳곳이 막히거나 뚫린 미로형의 전시공간은 명상적 분위기를 물 씬 풍긴다. 담양 소쇄원 정자에 걸린 전통회화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 품을 동시에 배치한 전시장 입구와 소변보는 순간을 저속촬영으로 포착한 잉게보르그 뤼셔의 사진작업에서 보이듯 빠름과 느림의 차이를 대조하며 우리 의식에 무의식적으로 스며든 속도의 강박관념을 표현하는 데 기획의 도가 집중된다.
베르나르 마카데(프랑스)가 맡은 ‘생성전’은 생명의 근원적 상태와 변 화양상을 남성중심사회에서 소외됐던 여러 존재들(여성, 어린이, 동물 등 )에 초점을 맞춘 작업들로 보여준다. 자연광을 이용해 공간 전체를 신선 한 느낌으로 채운 배치방식이 침침한 속도전의 공간과 대조를 이룬다.
미국 LA현대미술관장 리처드 코살렉이 기획한 ‘혼성전’은 ‘지역, 인종 , 계층, 세대, 성’이라는 위계질서의 벽을 뛰어넘어 이질적 문화들이 서 로 혼재되는 단면들이다.
한국 미술평론가 성완경(인하대 교수)씨가 맡은 ‘권력전’은 음습한 미 로형 전시장이 암시하듯 일상 속에 음성적으로 개입한 현대사회의 ‘얼굴 없는 권력’을 다룬다. 까만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는 나이젤 롤프의 섬뜩 한 비디오 작품과 나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살인용광로 디자인을 응용한 루이스 캄니처의 설치작품은 현대적 권력의 본질을 생생히 보여주는 대표 작들이다.
한국계 미국건축가 박경씨가 기획한 ‘공간전’은 베이루트, 고베, 싱가 포르, 광주 등 세계 주요 도시의 개발모형을 비교전시하며 보편성과 지역 성을 고민하는 건축문화의 현실을 드러내 보인다. 고베지진 당시 난민들 을 위해 제작된 시게루반의 종이튜브집과 아라타 이소자키의 마카우 인공 섬 프로젝트가 눈길을 끈다.
특별전에는 2백61명의 국내작가들이 참가한다. 한국미술의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한마당이다. 평론가 김진송씨가 큐레 이터를 맡은 ‘일상, 기억 그리고 역사전’은 해방공간, 한국전쟁, 군사 정권시대, 민주항쟁기를 거치면서 각 시대를 수놓은 사진, 만화, 영화, 회화 등의 시각물들을 총체적으로 형상화했다. 50년대부터 지금까지 주요 영화장면 따위를 파노라마식으로 보여주는 60년대풍 영화관 형태의 설치 작품이 인기를 끌 것으로 보인다.
큐레이터 박영택씨가 꾸린 ‘삶의 경계전’은 무속에 담긴 전통적 의식과 이미지들이 현대미술에 미친 영향을 더듬는다. 무속이미지를 종교적 틀로 만 해석하는 시각을 피하고 사진과 설치, 컴퓨터 가상공간 등을 통해 무 속의 초현실적인 속성을 조명한다. 부적을 재해석한 추상적 조형물(김홍 주씨)과 한지로 떠낸 발 모양의 조형물(홍명섭씨)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 유준상 조직위원장이 큐레이터를 겸한 ‘동서명작전’은 세잔 르누아르 피카소 미로 오지호 이상범 변관식 심주 진홍수 등 근현대 동서양 작가들 의 작품을 국내 최초로 비교전시한다. 유재길, 오병욱, 조광석씨가 기획 한 ‘청년정신전’은 ‘이미지 다시 보기’와 ‘남도성’ ‘과학성’ 등 의 소주제로 나뉘어 전통과 현대성, 사회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설치와 테 크놀로지, 회화 등의 형식으로 표현한다.
시민들이 작품제작에 함께 참가하는 ‘도시의 꿈전’은 도청 앞, 금남로, 예술의 거리, 중외공원 일대를 무대로 벽화와 그래픽, 대형조각보 설치작 업 등을 펼쳐 보일 예정이다.
동서양 비교전시하며 관객도 작품제작
(사진/본전시 `권력전'에 출품된 아틀리에 반 리쇼우트 작 <말린 소시지>. 가축 도살장비와 도살과정을 담은 비디오물이 결합된 설치작품을 통해 원초적인 인간생존의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
외형적으로도 이번 비엔날레는 첨단 전시기법의 도입과 관객들의 효과적 인 동선마련에 염두를 두는 등 행사의 질적 극대화에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 시상도 1회 때처럼 존속시키되 본 전시 소주제별로 공로상격인 무등상을 순위없이 주기로 했다. 전시를 총지휘하고 있는 강연균(57) 비 엔날레 사무처장은 “관객수에 치중해 행사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며 “본 전시관 입장객수를 적절히 통제해 미술을 제대로 음미 할 수 있는 행사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전반적으로 광주비엔날레는 전시주제의 내용이나 참가작가 면에서 1회 때 보다 양질의 행사가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서구작가들로 두터운 퇴적층을 형성한 세계미술계가 광주비엔날레의 몸짓을 얼마나 진 지하게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지구촌의 새 문화지도를 그리는 미술운동 의 본산이 될 것인가, 변방의 메아리없는 미술행사에 머물 것인가. 아시 아권을 대표하는 비엔날레로서의 국제적 위상 정립이라는 과제를 안고 ‘ 광주비엔날레호’는 곧 대망의 돛을 올리게 된다.
광주=노형석 기자/ 한겨레 문화부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04일 제 1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