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진단

“국보법 먹을래, 애인 호출할래”

학원강사 이승은(26)씨는 지난 8월14일 오전 7시 집 앞에서 자신을 수사 관이라고만 밝히는 중년남자 여럿을 만났다. 이씨는 동행을 거부했지만 수사관들은 막무가내였다. 임의동행 요구를 거부할 수 있는 경찰관직무집 행법 제3조 2항은 지켜지지 않았다. 또 동행 요구시 수사관의 신분증, 소 속, 성명, 동행목적과 이유, 동행장소를 밝혀야 하는 같은 법 제3조 4항 도 어겼다. 근처 파출소로 강제연행된 뒤에야 이씨는 자신의 연행이 남자 친구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남자 친구는 한총련 조국통일위원회 정 책국장으로 수배중이었다. 이씨가 남자친구에게 준 호출기를 추적해 찾아 온 것이었다.

수사관들은 오전 7시30분께부터 가택수색을 시작했다. 물론 압수수색영장 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집에서 민중가요 노래책 <노래만큼 좋은 세상>이 나오자 수사관을 “이걸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걸어 몇달 살게 할 수 도 있다”며 위협하기도 했다. ‘코에 걸면 코고리, 귀에 걸면 귀고리’ 식으로 국가보안법을 집행하는 수사기관의 관행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수색이 끝나자 수사관들은 이씨를 서울시경 장안동 대공분실로 연행했다. 조사를 받으면서 수사관들은 “애인이랑 같이 잤냐”는 모욕적인 말도 서 슴지 않았다. 수사관들은 이번에는 이씨를 데리고 인사동 찻집까지 갔다. “남자친구 호출기에 녹음해서 지금 만나자고 약속해라. 너 모르게 잠복 해 잡겠다”는 게 수사관들의 요구였다. 남자친구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 제서야 이씨는 풀려날 수 있었다.

공안당국의 한총련 와해 과정에서 무리한 수사가 진행되면서 최근 이씨와 같은 피해자가 속속 나타나고 있다. 한총련에 대한 비판 여론을 등에 업 고 무리하고 강압적인 불법수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수배자를 숨겨줬다가 고초를 당하는 이들도 많다. 96년 한총련 의장 정명 기씨에게 방을 빌려줬다가 국가보안법상 편의제공 혐의로 구속된 최아무 개씨도 그런 경우다. 같은 집에 살았던 황지혜(21)씨는 “정씨가 처음 집 에 올 때 이종명이라는 가명을 써서 전 한총련 의장이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는데도 수사관들은 처음부터 최씨와 나를 죄인 다루듯이 했다”고 말 했다. 수배자에게 잠자리를 제공했다가 곤욕을 치른 사례는 흔한 경우다. 수사당국은 국가보안법상 편의제공으로 구속시키기 힘들 때는 집에 있는 책을 내세워 이적표현물 소지죄로 구속하기도 한다.

무리한 연행과 수사로 인권침해를 당하는 경우도 드러나고 있다. 염미임( 20)씨는 8월15일 조계사에서 농성중이던 남자친구를 만나 옷을 줬다는 이 유로 근처 종로경찰서에 연행돼 양말, 속옷까지 모두 벗기는 몸수색을 당 해야 했다. 염씨는 현재 집시법 위반으로 불구속입건된 상태다. 형사가 집에까지 찾아오는 통에 염씨는 몸수색 당하던 악몽이 계속 떠오른다며 정신적인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8월13일 한국외국어대 용인캠퍼스 총학생회 사무국장 김경환씨가 잠실대교 북단에서 투신자살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그가 떨 어진 자리에서 <씨네21> 한권이 발견됐다. 그 안에는 “너무 힘들다. 이 제 영원히 쉬고 싶다”는 김씨의 낙서가 적혀 있었다. 김씨는 경기도경의 내부수배자였다. 김씨는 죽기 전 몇달 동안 고시원에서 숨어지냈다고 한 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04일 제 1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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