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삶

피해·가해자가 함께 부른 진혼곡

(사진/발굴된 유골은 두개골이 골절되는 등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한·일 대학생들이 유골의 수분을 제거해 코팅처리하고 있다.)

“밟아도 밟아도/ 죽지만 말라/ 또다시 꽃피는/ 봄이 오리라….”

일제 강점기에 일본 홋카이도로 끌려가 강제노동에 동원됐던 조선인들이 울분을 삼키며 불렀던 <밟아도 아리랑>의 한 구절이다. 그러나 댐공사와 철도공사에 마소처럼 이용되다 끝내 숨진 사람들은 공사장 근처에 아무렇 게나 묻히고 그리고 잊혀졌다.

당시 피해자와 가해자였던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반세기가 넘게 강제 노동 희생자들의 원혼이 떠돌고 있는 홋카이도 현지에 모여 함께 이들의 넋을 달래고 유골을 수습했다.

지난 7월30일부터 8월7일까지 계속된 ‘홋카이도 슈마리나이 강제노동 희 생자 유골발굴 한·일 대학생 공동 워크숍’에 참여한 우리나라 학생들은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중앙대 일본학과, 서강대 사회학·정외과, 숙명여대 교육학과, 국립예술원 연극원·영상원 학부생 과 대학원생 등 30여명이다. 여기에 일본 각지에서 찾아온 대학생 25명 및 재일동포 대학생 등이 참여해 처음으로 한·일 대학생들의 공동발굴조 사단이 구성됐다. 정병호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와 도노히라 요시히코 홋카이도 민중사강좌 대표(일승사 주지)가 양쪽 단장을 맡았으며, 이밖에 지도교수단과 사무국 관계자 현지 자원봉사자 등 모두 3백여명이 참여했 다.


조선인 36명 숨져, 20구는 발굴 안돼

이들이 발굴조사를 벌인 홋카이도 우류군 호로카나이쵸 슈마리나이(朱鞠 內)는 1935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최대의 댐공사와 철도공사가 이뤄진 곳이다. 이 공사에는 기록상 모두 3천명이 동원됐으나 당시 공사 관계자 들의 증언에 따르면 최대로 동원됐을 땐 7천명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인 에 대한 강제연행은 1939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일본인 다코베야(사기계약 에 의한 신체구금, 강제노동 수탈방식) 노동자들도 동원됐다. 그러나 당 시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강제로 끌려왔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자료는 없다. 다만 현지 매화장인허증과 호로카나이 광현사(光顯寺)에 모셔진 위 패 조사 등으로 나타난 공사장의 희생자는 모두 204명으로 이 가운데 조 선인은 36명이다. 그러나 공사 참여자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공사중 추락 해 사망한 시신을 그대로 콘크리트로 덮는 등 희생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 76년부터 일본의 지식인과 종교인 등 일본인들에 의해 희생자에 대 한 조사가 진행돼 지난 80년부터 지금까지 16구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 유골들은 종교적 의식에 따라 화장됐으며 이 가운데 신원이 밝혀진 2구는 고국으로 돌아와 망향의 동산에 묻혔다. 그러나 아직도 조선인 희생자 대 부분의 유골은 공동묘지 근처 숲과 들판에 묻힌 채 방치돼 있는 실정이다 .

지난 7월30일 슈마리나이 현지의 발굴현장에 도착한 발굴단은 추모식과 개토식을 가졌다. 발굴지역은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서쪽 숲 약 1000㎡에 이르는 면적으로 가로세로 5m씩 구간을 나눠 조별로 발굴하기로 했다. 발 굴 참가자들은 지난 91년 10월에 건립된 희생자의 묘표 앞에서 한일공동 추모의식을 가진 데 이어 일본쪽 공동단장인 도노히라 스님의 독경과 진 오구굿 전수자인 오신숙씨 굿으로 두 나라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랬다.

7월31일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간 발굴단은 한·일 대학생 등 7명으로 조 를 짜 삽과 호미, 손수레 등을 동원해 땅을 파고 들어갔다. 오전 11시30 분께 한 구간에서 40㎝를 파고들어가자 땅을 팠던 구덩이 흔적이 발견됐 다. 가로 세로가 1m가 좀 안 되는 방형의 구덩이 흔적이었는데, 테두리에 는 당시 땅을 파서 삽을 댔던 자국까지 그대로 드러나 보였으며 흙 색깔 도 달랐다. 특히 잔뿌리들이 무성해 유골이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 였다.


나무상자에 시신 꾸겨 넣어 매장

이튿날 아침부터 조사단은 이 구멍을 파들어가기 시작했다. 구덩이를 겨 우 10㎝ 정도 파들어가자 머리뼈 일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다른 구간을 파던 발굴단의 시선도 이곳으로 집중됐다. 유골의 형태를 완전히 드러내 보니 시신을 쭈그려 앉혀 약 45㎝ 길이의 정사각형 나무상자에 꾸겨넣어 묻은 것으로 판명됐다. 끝까지 파고 들어가 바닥을 확인했을 때 깊이는 고작 땅 표면에서 90㎝ 정도였다. 조사단은 유골을 바로 아세톤으로 세척 해 수분을 제거한 뒤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화학약품으로 코팅처리를 했 다.

발굴단의 조사결과 유골 주인은 키 160㎝ 안팎에 나이는 18∼20세의 한국 인 남자로 두개골 골절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됐다. 발굴단이 강제노동 희 생자 매장기록부와 대조해본 결과 나이와 사인이 전남에서 강제 동원된 한 조선인과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두번째 유골은 8월3일 오후에 발견됐다. 첫번째 유골이 발굴된 곳에서 약 10m 정도 떨어진 데서 발견된 1m 정도 길이의 정방형 구덩이에서였다. 여 기서 나온 유골은 맨 처음 발견된 유골과 나무상자의 크기나 묻혀 있는 자세 등이 거의 동일했다. 특이한 점은 유골 왼편에 마치 구부러지지 않 는 시신을 구부려 고정시키려고 의도한 것처럼 보이는 굴렁쇠가 함께 나 온 점이다. 그러나 유골의 보존 상태가 나빠 당장 신원을 추정하기 어려 웠다.

비가 거세게 내린 5일 또 한 구덩이가 발견됐다. 앞서 발굴된 2구의 유골 들이 얕게 묻힌 것과 달리 이 구덩이는 깊이가 140∼147㎝나 되어 다른 유골들과는 달리 더 정성들여 묻은 것으로 보였다. 이 구덩이에서는 남쪽 과 북쪽으로 나란히 2개의 나무상자가 발견돼 두 사람이 함께 매장된 것 이었다. 또 화장한 뒤 뼈를 추려 매장한 것처럼 발굴된 뼈의 수가 상당히 적었고, 부장품으로 묻은 듯한 동전과 곰방대, 도장 등도 함께 발견돼 일 본인 희생자의 유골로 밝혀졌다.

지난 7일 발굴작업을 마무리한 발굴단은 조선인 희생자로 추정되는 유골 2구 가운데 신원 추정이 가능한 한 구와 나머지 한 구로부터 채취한 샘플 을 지난 11일 국내로 송환해왔다.

정병호 교수는 “신원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유골의 경우 땅을 70∼90㎝ 정도로 얕게 파고 시신을 쭈그려 앉힌 채 묻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두개골 의 파손 정도가 매우 심했다”고 밝히고 “9월중 유족으로 추정되는 사람 과의 DNA 검사를 통해 희생자의 신원을 확인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그동안 공동묘지 구역이 확장돼 묘지 안쪽에도 희생자들의 유골이 많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번 발굴도 주매장지역의 주변 으로 국한된 것”이라고 밝히고 “이에 따라 주매장지역인 공동묘지 구역 을 조사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 만큼 앞으로 현지 관계기관과 협의를 거 쳐 추가적인 발굴작업을 벌여야 할 것”고 말했다. 그는 또 “그동안의 발굴작업이 인류학이나 고고학 등 관련분야의 전문적인 토대가 없이 이뤄 져 신원이나 사인, 매장방법 등 실증적 사실을 제대로 수집하지 못했다” 면서 “이번 발굴에서는 국내의 전문가와 관련분야 학생들이 참가해 처음 으로 과학적인 발굴이 이뤄진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발 굴에는 박선주 충북대 형질인류학 교수가 책임연구원으로, 황상익 서울대 의대 교수가 전문위원으로 참여했다.


한·일 신세대, 과거사 규명에 공동 노력

이번 발굴에 참가한 두 나라의 젊은이들이 조상들의 유골을 수습하는 것 이외에 양국 학생위원회를 구성해 민족감정을 넘어선 이해와 우정을 나눈 것도 큰 수확이다.

발굴 현장에는 일본 고교생들과 교사들에게 숙식을 제공한 마을주민 및 자원봉사자, 아이누 원주민들의 방문과 성품 지원이 잇따랐다. 또 일본 유학생과 민단계열의 오사카 민족교육촉진협의회 회원들도 찾아와 작업을 돕거나 음식을 전달하는 등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이곳 슈마리나이에 강제징용으로 끌려와 홋카이도 몬베츠에 정착한 박남칠(76) 할아버지는 4번이나 차로 6~7시간 걸리는 현장에 찾아와 손수 잡은 연어 등을 건네며 발굴단을 격려했다. 박 할아버지는 “안동출신으 로 동갑내기였던 작은 몸집의 친구가 옆방에 있었는데 병이 들어 괴로워 하다가 결국은 숨졌다”며 눈시울을 붉혀 학생들을 숙연케 하기도 했다. 발굴작업에 참가한 북해도 아시아 아프리카연대위원회 상임이사 카게야마 아사코(33·여)는 “일본 군국주의는 당시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인도 희생자로 만들었다”면서 “이번 발굴과정을 통해 두 나라의 신세대들이 함께 땀을 흘리며 공통의 과거사를 규명하는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진정한 이웃으로서 미래 한일관계를 만들어가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학생위원회 한국쪽 대표인 김영환(25·서강대 정외4)씨는 “이번 발굴작 업 과정에서 조총련계 동포 3세 등 재일동포들을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누 면서 이들이 분단의 아픔을 그대로 살아가면서도 얼마나 우리 것을 사랑 하고 민족적 뿌리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하는지를 깨닫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지창은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04일 제 173호


커버스토리 포커스 문화시대 특집 지난호 전체보기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