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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적 상품에 무너지는 언어문화

(사진/청바지를 사기 위해 줄을 선 루마니아의 청년들. 1989년 혁명 이후 루마니아는 서구의 상품과 함께 들어온 서구 자본주의의 언어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차우셰스쿠 정권을 무너뜨린 지난 89년 혁명 이후 루마니아가 서구 자본 의 ‘언어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가 도입되면서 브로커 등 새로운 단어가 통용되는가 하면, 일개 상품명이 그 품목 전체를 상징 하는, 일반명사화하는 경우가 크게 늘고 있는 것이다.

루마니아에서는 나이키가게에서 ‘나이키’운동화를 살 때 ‘아디다시’ 를 달라고 하면 된다. 상품명 ‘아디다스’의 복수형인 ‘아디다시’가 이미 ‘고급운동화’라는 일반명사가 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이키뿐 아 니라 리복·아식스 등 고급운동화를 살 때면 항상 ‘아디다시’를 찾아야 한다.

물론 루마니아어에도 운동용 신발이라는 단어가 있다. 그러나 ‘아디다시 ’가 널리 사용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아디다스사가 이 ‘새로운 시 장’에 나이키나 리복보다 먼저 발을 들여놓았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아 디다스가 나이키 혹은 리복과 같은 스포츠회사보다 한발 먼저 이 나라에 서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희고 깨끗한 운동화’를 선보였다. 그래서 루마니아인에게 ‘고급운동화=아디다스’라는 등식을 심어준 것이다.

물론 이런 현상이 루마니아에서만 나타나는 특수한 현상은 아니다. 한국 의 경우에서도 커피 크림을 프림이라고 하고 사륜구동 자동차를 지프라고 하는 등 그 예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 루마니아의 문제점은 외래의 단일한 상품이 품목 전체를 상징하는 경우가 유독 많다 는 데 있다.

루마니아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는 ‘네스’를 달라고 해야 한다. 루마니아사람들은 가루로 만들어진 인스턴트 커피를 ‘네스’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시 루마니아 시장을 선점한 유명한 식료품 제조회사 네슬레의 ‘네스카페’에서 온 것이다.

이외에도 ‘질레트’가 면도기를 상징하는 말이 되고, ‘팸퍼스’에서 온 ‘팜페르스’는 일회용 기저귀의 일반명사가 됐다. 또 커피용 크림은 ‘ 콤프레트’로 흔히 명명된다. 특히 컴퓨터의 경우 개념들이 거의 대부분 시장선점 제품명과 일치한다.

하지만 ‘콜라’의 경우 우리나라와 같이 콜라라는 재료가 사용된 음료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코카콜라를 의미한다. 펩시콜라는 펩 시라는 단어로 존재한다. 아마도 코카콜라와 펩시콜라가 비슷하게 루마니 아 시장에 등장한 탓일 것이다.

물론 한 상품이 전체 품목을 대신하는 경우는 혁명 이전에도 있었다. 하 지만 그것은 지금과 같이 한 제품이 다른 여러 제품들을 제치고 압도적으 로 사용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한 회사의 제품밖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 문이다. 예를 들어 빨랫비누는 ‘데로’라고 불렸다. 왜냐하면 혁명 이전 루마니아의 빨랫비누로는 ‘데로’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또 같은 이유로 애프터셰이브는 ‘라라’로 불렸다.


깨어진 정신을 비추는 거울

시장경제 도입으로 인한 단어의 변화는 이런 새상품 도입 현상에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니다. 시장개방은 상품 이외에도 많은 새로운 사회현상을 만 들었고, 당연히 이런 새로운 사회현상은 새로운 단어를 필요로 했기 때문 이다. 예를 들어 루마니아사람들은 주식을 거래하는 행위를 혁명 이후 처 음 접하게 된다. 또 각종 행위에 대한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이를 중계하 는 행위도 눈에 띄게 늘었다. 또 외국자본과 공동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행위도 경험하게 됐다. 주식중개인, 브로커, 합작회사 등 이런 현상들을 설명하는 단어들은 우리에겐 이미 낯익다. 그러나 루마니아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단어들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런 사회현상들을 나타내는 단어 들이 대부분 영어와 함께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루마니아 내부에서 미 처 정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새로운 문물이 물밀 듯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 물론 이들 새 단어들은 최근 새롭게 증보된 사전에도 등재되지 않는 등 아직 사회적으로 완전히 인정된 것은 아니다. 또 기존에 있던 단어들의 의미가 확대되어 사용되거나 그 의미가 변화되어 사용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한 사회의 언어는 그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과 같다고 한다. 언어는 단독 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언어가 사용되는 사회와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 며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조건들 속에 남아 있게 되기 때문이다. 사회변 화와 더불어 그 사회의 언어도 함께 변화할 수밖에 없음은 어쩌면 너무나 도 당연한 일이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가장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는 부 분은 단어 분야이다. 왜냐하면 항상 새롭게 생성되고 변화되어가는 인간 의 사고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현대 기술문명을 표현하고 이해 하기 위한 기본단위가 바로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어는 다수의 사 람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져 지속적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혹은 도태되기도 한다.

그러나 언어의 거울로 현재 루마니아의 상황을 살펴보면 루마니아의 현재 상태는 ‘혼란’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혁명 이후 체제변 화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회적 혼란상은 이렇게 외래상품의 과도한 일반 명사화 이외에도 곳곳에서 확인된다. 특히 많은 신조어들이 생겨났다가는 곧 사라지는 점이나, 번역되어 만들어진 전문적인 몇몇 어휘들이 오히려 원래의 개념에 접근하는 데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그 대표적 사례다.

루마니아의 단어변화에서 느낄 수 있는 특이점은 주위의 슬라브민족들의 단어 유입에는 그렇게 완강했던 루마니아의 민족주의가 서구 자본의 공격 적인 소비재 상품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경계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를 꿰뚫는 자본의 힘은 그만큼 강력한 것인지도 모른다.

부쿠레슈티=엄태현 통신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04일 제 1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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