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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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 독일사회를 동서로 길게 갈라놓았던 국경선의 남쪽 끄트머리이자, 체코의 프라하를 향한 길목에 자리잡은 바이로이트시. 해마다 8월이 되면 오랜 역사의 자취를 간직한 인구 20만의 이 자그마한 도시 전체가 술렁거 린다. 바이로이트라는 원래의 이름보다도 ‘바그너의 도시’, 혹은 ‘오 페라의 도시’로 우리에게 더욱 알려진 이 도시에서 한달간 열리는 오랜 전통의 ‘바그너 오페라축제’를 즐기기 위해 전세계 관광객들이 몰려들 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페라축제의 웅장한 선율과 함께 들리는 바그너에 대한 다양한 평가는 통일 뒤 독일의 이데올로기 지형이 얼마나 복잡한지를 여실히 보 여주는 사례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끝없는 저항
바그너의 음악을 ‘단죄’했던 동독 내에서 그에 대한 재평가바람이 부는 등 유럽대륙의 격변기인 ‘19세기를 살다간’ 그의 삶을 둘러싼 논쟁의 불씨가 전혀 사그러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바그너가 살아 있던 당시 그에 관해 쓰였던 단행본과 논문의 양이 어림잡 아 1만여편에 이른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그의 ‘음악’을 소재로 하지 않았다. 이는 바그너가 음악가이기 이전에 19세기 유럽대륙에 나타났던 두드러진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18 48년을 고비로 유럽대륙에 휘몰아쳤던 혁명의 기운이 어느덧 사그러진 이 후 약 70년간의 시기 동안 커다란 흐름을 이루었던 이른바 ‘바그너주의 ’는 이렇게 당대의 시대정신이 더 구체적인 형상으로 드러난 예로 받아 들여지고 있는 셈이다.
바그너에게 예술이란 “인간정신을 최고도로 고양시키는 한에서만 절대적 인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예술은 영혼의 고귀함 을 무참히 짓누르는 19세기 사회질서에 대한 가장 강력한 무기여야만 했 다. 자신의 음악을 통해 완전한 모습으로 구체화시키려 했던 바그너의 삶 자체 아니, 바그너에 매료되었던 당대의 ‘바그너주의자’들이 스스로를 “자본주의, 자유주의, 다윈주의에 대한 철저한 응징”으로 자리매김했다 는 사실은 이 점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인간성을 파괴하는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끝없는 저항, 다 시 말해 그들 나름대로 이해한 ‘반근대’의 움직임이 ‘후발산업국가’ 독일의 바그너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데서 역사적인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 자유주의 물결에 대한 맹목적 부정은 나폴레옹의 정복 이래 조금씩 싹 터온 ‘프랑스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자본주의의 냉혹성 에 대한 비판은 당시 경제적 부를 획득해가던 유대민족에 대한 적개심 속 으로 별다른 동요없이 녹아들어간 측면이 컸기 때문이다.
“유대민족에게서는 진정한 예술이 싹틀 수 없다”는 바그너의 확신이 당 시 점차 싹트고 있던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 움직임에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뿐만 아니라 바그너의 삶 자체가 뒷날 아돌프 히틀러를 열광시켰다. 이에 따라 ‘히틀러 안에 살아 있는 바그너 ’, ‘바그너 안에서 싹튼 히틀러’라는 표현은 지금까지도 ‘인간 바그 너’를 평가하는 가장 강력한 잣대로 남아 있다.
바그너에게서 위대한 게르만을 찾는다
바그너가 남긴 웅장한 오페라 선율의 뒤켠에서 독재자의 광기를 떨어버릴 수 없는 사정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런 비판의 한켠에선 ‘게르만 문화의 위대함’을 온전히 펼쳐보 이고자 했던 바그너의 삶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들추어내고자 하는 움 직임이 옛 동독지역을 중심으로 싹트고 있다. 또 그의 예술적 가치를 주 류질서에 대한 끝없는 긴장과 저항에 초점을 맞춰 재평가하려는 목소리가 최근 들어 조금씩 힘을 얻기 시작하고 있다.
어쨌든 오페라의 거장, 바그너의 작품이 이스라엘에서는 여전히 금기시되 어 있는 현실에서 잘 드러나듯 올해 ‘바그너축제’에서 울려퍼지는 웅장 한 선율 역시 많은 이들에게는 다소 껄끄럽게 느껴질 것이다.
브레멘=최우성 통신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04일 제 1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