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경의 맛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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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 수수알처럼 굵직한 알을 한아름씩 밴 도루묵이 생선가게마다 수북 히 쌓이던 모습은 아직 우리 기억 속에 생생하다. 그런데 최근 5~6년 사 이 그 흔하던 도루묵이 생선가게에서는 물론 산지인 동해안에서조차 웬만 해선 구경할 수 없는 귀물이 됐다.
가격도 동해바다에서 나는 생선 중 최고의 몸값을 누리고 있다. 도루묵이 가장 제맛난다는 요즘 삼척의 정라항과 북평항 등에서는 깔끔한 스치로폴 상자에 가지런히 담긴 도루묵 1백60~2백마리 한 상자가 30만원선을 오르 내린다. 마리당 1천5백원~2천원 꼴이다. 바다생선으로 모래무지만한 생 선 한 마리에 2천원이면 가히 제주의 옥돔을 능가하고 남을 가격이다.
이처럼 동해안에서 가장 값비싼 생선이 된 도루묵은 추석을 앞두고 연안 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미 좁쌀같은 알을 배고 있어 한참 기름지고, 맛 이 일품이다. 추석을 지나면 알은 차츰 굵어지고, 11월부터 12월에 산란 을 한다. 수심 1m 안팎의 해안가 수초와 바위틈에 산란을 하기 때문에 파 도가 심하게 치는 날이면 모래밭으로 밀려나와 그냥 주어오기도 한다.
한때 도심에 대량으로 나오던 도루묵은 바로 이때 잡은 것이다. 이미 살 이 쪽 빠지고 알 투성이라 맛하고는 거리가 멀다. 알도 그저 우득우득 씹 힐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루묵하면 알이 덕지덕지 붙은 명태새끼 같 은 모습으로만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루묵은 어떤 생선도 마찬가지지만 먹는 때가 따로 있다. 산란을 준비하고 있는 요즘이 그 시기다. 살이 오를대로 오르고 기름지지만 비리 지 않아 담백하고 고소하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가시가 연해 굽거나 조 림을 해놓으면 가시째 그대로 먹을 수 있다. 김장 때 생태 대신 속에 넣 으면 김치맛도 그만이다.
하지만 이런 진한 맛거리가 이제는 향수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지금 잡히는 것은 그 맛이 일본인들 식성에 딱 맞는다는 이유로 전량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다. 알이 성숙했을 때는 알에서 백혈병 치료제를 추출한다고 해 역시 일본으로 수출한다. 이래저래 몽땅 일본으로 직송되는 셈이다. 더욱이 사람들은 도루묵 알이 암에 좋다는 소문 때문에 모조리 건져다가 쪄서, 우득우득 씹어 속물은 빨아 먹고 껍질은 뱉어버린다. 이러기를 4~ 5년 되풀이하는 사이 그 흔하던 생선이 멸종될 위기에 처했다. 올해는 값 이 더욱 치솟아 어민들도 먹어볼 엄두를 못 내게 됐다며 아쉬움을 털어놓 는다.
요즘은 동해안에서 비교적 소비성향이 높다는 삼척과 동해에서도 몇 집 정도가 도루묵 요리를 낸다. 그나마 구이와 조림(찌개) 모두 크고 작은 것을 섞어 10마리 정도를 기준해 2만~2만5천원하는 고급식단에 든다. 삼 척 시내 남양동 항구식당(0397-73-0616) 주인 고옥출(44)씨는 “제철 도 루묵 맛을 아는 손님들을 위해 내기는 내지만 값이 비싸 별 재미는 못본 다”고 한다. 어쩌다 값이 20만원대로 내려갈 때는 그런대로 넉넉히 담아 내지만 요즘처럼 30만원대에 이르면 남는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끓이는 방법도 옛날처럼 푸짐한 매운탕 냄비가 아니고, 예쁜 찜 냄비에 무와 감자를 큼직큼직하게 썰어 깔고, 양념장을 풀어 풋고추와 양파, 마 늘 다진 것과 대파를 얹어 자박자박하게 조림을 해 내놓는다. 구이 역시 소금만 살짝 뿌려 양쪽으로 접는 석쇠에 물려 가스렌지에 구어 내는데, 입에서 녹는 듯한 연한 질감과 담백하고 감칠맛이 이를 데 없다.
제철 도루묵은 임금님도 탐낸다
해안지방에 전해오는 일화를 들어보면 도루묵은 본래 ‘묵’ 이라는 생선 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 한 임금이 피난길에 수라상에 오른 묵을 먹고 하도 맛이 있어 이름을 은어(銀魚)라 고쳐 부르고 상놈들은 먹지 못 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그래서 지금도 함경도에서는 더러 은어라고 부른 다고 한다. 임금은 환궁 뒤 다시 이 생선을 올리도록 해 먹었으나 전혀 그 맛이 아닌지라, 상에서 물리며 “도로 묵이라 부르라” 했다는 것이다 . 이후 묵의 이름은 도로묵 또는 도루묵이 됐다고 한다.
정설은 물론 아니지만 이토록 제철 도루묵은 임금님도 탐낼 정도라는 이 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옛 어른들은 불시불식(不時不食)이라 해 제철이 아니면 먹지 않았다. 아무쪼록 산란기에는 알이라도 철저히 보호해 멸종 만은 시키지 말았으면 좋겠다.
삼척가는 길은 기차와 버스가 있고, 승용차의 경우 영동고속도로 새말인 터체인지에서 안흥~평창~정선으로 이어지는 샛길로 들어가 임계를 거쳐 백봉령을 넘는 것이 가장 빠르다. 서울에서 5시간대. 평창 송어장과 아우 라지, 무릉계곡, 추암일출과 죽서루 등을 들러볼 수 있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04일 제 1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