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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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아벨라르. 서양 중세를 대표하는 신학자요 철학자로서 파리대학 교수와 수도원장을 지낸 그는 거세당한 남자였다. 그가 거세라는 불행을 당한 것은 마흔살 때의 일이다.
그때 파리에는 엘로이즈라는 열일곱살 처녀가 살고 있었다. 노트르담 성 당 참사회원 풀베르의 조카인 엘로이즈는 라틴어, 그리스어에 능통하고 철학, 문학에 뛰어나 여느 대학교수보다 낫다는 평을 듣는 아름다운 처녀 였다. 조카딸의 교육에 열심이던 풀베르는 철학자로 명성을 날리는 아벨 라르를 엘로이즈의 가정교사로 들였다.
풀베르는 아벨라르를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벨라르는 금욕주의 자로 정평이 나 있는 데다 풀베르와 마찬가지로 성당 참사회원이었기 때 문이다. 참사회원은 명예와 출세가 따르는 직책이지만 독신의 의무를 지 켜야 한다. 오만하고 자존심 강하며 야심만만한 아벨라르가 자신의 명예 와 출세에 오점을 남길 일을 하진 않을 거라고 풀베르는 믿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끄는 온갖 매력을 갖춘 엘로이즈에게 아벨라르는 빠져들었고 두 사람은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열정에 휘말렸다. 얼마지않 아 이 사실을 알게 된 풀베르가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 했을 땐 이미 엘로 이즈는 임신중이었다.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의 고향으로 가 아들을 낳았다 . 아이는 그후 아벨라르의 누이에 의해 양육된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친지 몇사람만을 불러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결혼은 비밀에 부치기로 풀베르와 합의했다. 아벨라르의 장래를 위해서였 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으나 한집에 살지 못하고 이따금씩 남의 눈을 피해가며 만났다. 그러다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의 권유에 의해 수녀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풀베르로부터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야 한다는 이 유를 내세웠지만, 아마도 진짜 이유는 엘로이즈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신이 내게 보인 이 불신이 얼마나 나를 고통스럽고 부끄럽게 했는지…” 훗날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쓴 통한에 찬 편지의 한 구절 이다.
풀베르는 불같이 분노했다. 엘로이즈를 유혹하더니 끝내 수녀원에 보내고 만 아벨라르를 그냥 둘 수 없었던 풀베르는 사람을 시켜 한밤중에 잠든 아벨라르의 성기를 잘라버리게 했다. 그후 아벨라르는 수도원으로 들어가 신에게 귀의한다. 수녀로, 사제로 각기 길을 가던 두 사람은 편지로 못다 한 인연을 이어갔다. 두 사람이 나눈 편지는 오늘날까지 남아 그들의 고 뇌와 아픔을 보여주고 있다.
엘로이즈가 수녀가 된 것은 신의 부름을 받아서도, 자신이 원해서도 아니 었다. 아벨라르가 원했기 때문이었다. 엘로이즈는 아벨라르를 사랑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다. 수녀원장이 되어서도 엘로이즈는 자신이 사랑 하는 건 신이 아니라 아벨라르라고 거침없이 말하고 있다. 아벨라르는 자 신이 엘로이즈와 벌인 애정행위가 죄였으며 그를 참회한다고 했으나, 엘 로이즈는 자신은 죄가 없으며 후회하지도 않는다고 단언한다. 죄는 행위 가 아니라 의도로 판단되어야 마땅하며 자신은 아벨라르를 진심으로 사랑 했으므로 결코 죄를 지은 게 아니라고.
그러나 아벨라르는 엘로이즈를 반강제로 수녀원에 보낸 데 대해 한번도 미안해하거나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도리어 육욕을 못이겨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 않게 된 걸 감사하고 충실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라고 충고했 다. 거세당한 자신에 비하면 엘로이즈의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 각해서였을까. 그런 아벨라르를 엘로이즈는 끝까지 사랑했다. 그리고 주 어진 길을 놀라운 인내로 묵묵히 걸었다. 아벨라르보다 엘로이즈의 사랑 이 훨씬 크고 깊었다.
1142년 아벨라르는 세상을 떠났다. 21년 뒤 엘로이즈도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은 지금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함께 누워 있다.
박은봉/ 역사연구가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04일 제 1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