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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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신한국당 당직자회의에 참석한 정형근 의원. 막강한 정보를 흘려 공안바람을 일으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한국의 매카시’, ‘공안정국 조성의 선봉장’, ‘마녀사냥 대장’…. 야당의 빗발치는 비난 속에서도 정형근 신한국당 의원은 태연해 보인다.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 월북사건이 ‘황장엽 파일’과 맞물리면서 정가에 불어닥친 공안태풍은 8월19일 “황장엽 파일은 없다”며 정치권에 자제를 요청한 권영해 안기부장의 발언으로 잠시 수그러들었다. 20일부터 정 의 원에게 야당의 십자포화가 쏟아졌다.
그러나 정 의원은 여유있게 “내가 먼저 기자회견을 자청하기를 했느냐. 기자들이 하도 물어 아는 정보를 일부 알려준 것뿐”이라고 말하며 미소 를 지어보이기도 했다. 권영해 안기부장의 발언에 대해서는 “안기부로서 야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를 원 하지 않을 것이며 또 그렇게 돼서도 안 된다”며 가볍게 피해갔다.
야당의원 내사설 흘려 오씨 월북 증폭
정 의원은 또 “안기부로부터 보고받는 채널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런 것은 말하기가…”라며 말끝을 흐린 채 시간을 끌다가 농담반 진담반 조 로 “나는 지금은 안기부와 관계없어요”라며 슬며시 빠져나갔다.
다만 정 의원은 “수사는 철저하게 이뤄져야 하지만 이런 문제가 여야의 정치공방으로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며 짐짓 물러서기는 했다. 하지만 과거 안기부 대공수사국장 당시 문익환 목사나 서경원 의원 방북 사건을 수사했을 때의 뒷얘기를 꺼내면서 오익제씨 사건도 김대중 총재와 관련있을 것이라는 식의 암시를 끊임없이 퍼뜨렸다. 언제든 야당, 특히 김대중 총재에 대해 기회가 잡히기만 하면 다시 또 공격해 들어가겠다는 모습이다.
오씨 월북사건의 진행과정에서 정 의원이 전면에 등장하게 된 과정은 이 렇다.
오씨가 월북한 사실이 8월16일 처음 보도될 때만 해도 일간지 1면의 2∼3 단 기사 정도의 비중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18일자 몇몇 조간신문이 오씨 가 황장엽 파일에 들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1면 머릿기사로 세웠 다. 마침 18일 아침 연합통신이 ‘공안쪽 정보통인 한 중진의원’을 인용 해 “안기부가 황장엽 파일에 있는 야당 중진의원 2∼3명을 내사한다”고 보도했다.
당연히 기사의 진원지로 정 의원이 지목됐다. 80년대 중반부터 10년 가까 이 안기부에 근무하면서 대공수사국장, 안기부 1차장 등의 요직을 지냈고 이미 여러 차례 공안사건에서 야당을 겨냥한 강성발언을 해왔기 때문이다 . 게다가 수사국장때인 92년 총선에선 수사국요원들의 홍사덕 낙선공작이 있었고 1차장때인 95년 지자체선거 직전엔 선거연기공작과 관련해 옷을 벗었다.
그러나 정 의원은 여러 언론사의 기자들이 찾아가 묻자 “황장엽 파일에 누가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며 연합통신 보도와 자신의 관련을 부인했다 . 정 의원은 다만 “황장엽 파일은 분명히 존재하고 안기부가 이에 대해 광범위한 내사를 벌이고 있다. 우리 정치권은 돈문제와 남북문제에서 자 유롭지 못하다”면서 정치인들이 이 파일에 포함돼 있을 것으로 보고 있 음을 내비쳤다.
안기부나 검찰, 청와대에서는 황장엽 파일이나 정치인 내사와 관련한 말 을 듣기 힘들었다. 그러나 19일자 몇몇 조간신문은 황장엽 파일 내사에 정치인이 포함돼 있다는 기사를 ‘고위 당국자’나 ‘공안당국 관계자’ 의 말을 인용해 실었고 정가에 공안바람은 한층 거세졌다.
정 의원은 발언의 수위를 높였다. “김대중 총재가 오씨 월북을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가 안기부 수사의 초점이다. 또 오씨가 북한으로부터 받은 공작금으로 국민회의에 당비나 공천헌금을 냈는지도 수사대상이다.” 안 기부의 수사 브리핑을 방불케 하는 발표였다. 정 의원은 4년 전에 안기부 를 떠났다. 하지만 김현희 사건, 서경원 사건, 이선실 사건 등 대형 공안 사건 수사를 도맡아 지휘해온 그의 경력은 지금도 안기부와 밀접한 연락 을 주고받고 있을 것이라는 추정을 낳기에 충분하다. 실제로 안기부가 자 신의 입이 아닌 정부나 여당의 비공식적 창구를 통해 수사상황을 흘려온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정 의원의 말을 쉽게 무시하기는 어렵다.
“내가 뭘…” 언론포화에도 끄떡없어
그러나 이날도 수사당국이나 청와대에서는 오씨 월북을 정치권과 관련짓 는 어떤 발언도 없었다. 또 국민회의 천용택 의원은 권영해 안기부장이 “정 의원에게 안기부의 수사정보를 제공한 일이 절대 없다. 정치권은 자 제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20일 조간신문부터 정치권 내
사 등 공안관련 기사의 비중은 크게 줄었고 정 의원을 매카시스트로 비난 하는 기사도 실렸다. 그러나 정 의원에게서 움츠러들거나 후회하는 듯한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신한국당 관계자들은 오히려 “장사 잘했다”고 계산하는 분위기다. 정 의원의 강성발언이 안기부의 수사속도를 빠르게 만들고 방향도 원하는 대 로 유도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안기부가 최소한 오씨의 국민회의 입당과 정이나 공천헌금 등을 냈는지에 대해서 수사를 안 할 수 없게 됐다는 것 이다.
안기부가 정 의원의 입을 통해 언론플레이를 한 것인지, 아니면 정 의원 이 자가발전하면서 안기부를 이 사건의 중앙으로 끌어들인 것인지 아직은 불분명하다. 신한국당 안에는 후자일 것으로 보는 입장이 많지만, 어쨌든 안기부 고위간부 출신 정치인은 ‘치고’ 안기부는 ‘빠지는’ 역할분담 이 잘 이뤄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신한국당 안에서 현재 정 의원이 차지하는 정치적 역할은 크다. 정세분석 위원장을 맡아 대선기획단에 참여하고 있으며 매일 오전 10시부터 열리는 기획본부단 회의에도 참석한다. 이회창 대표의 참모 가운데서도 한두손가 락 안에 꼽히는 핵심 측근인 서상목 기획본부장 주재로 민주계의 박종웅 기조위원장, 허주계의 윤원중 의원, 이회창 직계라인의 정태윤 특보 등이 참석하는 이 회의가 신한국당 선거캠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라 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오씨 월북사건이라는 ‘호재’가 나타났을 때 신한국당 안에서 이를 최대 한 활용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고 또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이 정 의 원이라는 점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고정간첩 5만명 암약’도 정의원 작품
정 의원의 이러한 실력은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의 망명 때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황 비서가 망명 의사를 밝힌 뒤 중국의 우리 영사관에 머물고 있을 때 정 의원은 국내 언론에 ‘남한 내에 암약하는 고정간첩이 5만명 이다’는 등의 가공할만한 황장엽 리스트를 흘렸다. 물론 ‘5만명 간첩설 ’은 그뒤 안기부에서 가능성조차 강력히 부인했던 소설이었음이 밝혀졌 다. 어쨌든 오씨의 월북사건에서 보여준 정 의원의 ‘활약’은 앞으로 유 사한 공안 관련 사건에서 안기부가 직접 표면에 나서지 않더라도 전직 간 부출신 정치인을 통해 어떻게 정치적으로 확대 이용될 수 있는지 잘 보여 주는 사례임에 틀림없다. 음지에서 일하는 안기부와 양지에서 활동하는 정치인의 공적, 사적 결합을 국민들이 본격적으로 감시할 때라는 지적이 다.
임범 기자/ 한겨레 정치부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04일 제 1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