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추적

수상한 금융위기 대공황 신호탄인가

(사진/한자리에 모인 종금사 사장들. 일단 어음회수를 중단하기로 했지만 20조원대에 이르는 기업어음을 쥐고 있는 종금사들이 언제까지 침묵할지는 미지수다.)

“감기다. 아니다. 폐렴이다.” 최근 국내 금융위기를 보는 정부와 금융 계간의 시각차이다.

재정경제원 등 정부는 최근의 금융위기를 일시적 ‘감기’에 비유하고 있 다. 한국은행 특별융자금 등 정부지원을 얻어내기 위한 업계의 엄살이 가 세해 금융대란설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금융계는 요즈음의 금융 상황을 ‘중증 폐렴’에 비유한다. 계속 방치했다가는 ‘폐암’으로 발전해 금융시장이 절단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금융계는 최근 양자간 인식차가 ‘책상과 시장의 거리감’에서 기인한다고 비판한다. 과연 어느 쪽 시각이 맞는가.


해태그룹 어음회수 중단으로 위기 넘겨

나라 경제를 위해서는 정부쪽 분석이 맞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최근 금융시장의 분위기는 삼엄하다. 흔히 돈의 흐름을 송사리떼에 비유한다. 물의 흐름에 영향을 주는 자그마한 파문에 도 쏜살같이 반응한다는 의미에서다. 그런 맥락에서 최근 돈의 흐름은 여 기저기서 쉴새없이 떨어지는 돌멩이 세례에 넋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송사 리떼와도 같다.

지난 8월20일부터 22일까지 사흘간 재계순위 24위의 해태그룹은 시쳇말로 지옥 문턱까지 갔다왔다. 기업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종금업계에서 연일 1천여억원대의 어음결제를 요구하면서 부도직전의 위기로까지 몰고 간 것이다. 21일 하루 동안 돌아온 어음은 모두 1천2백여억원, 22일에도 9백억원이 돌아왔다. 해태는 질겁했고 주거래은행인 조흥은행도 얼굴빛이 흑색으로 변했다. 재경원 등 정부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아사태 장기화로 가뜩이나 국내외 분위기가 삼엄한 판에 30대 재벌 중 하나인 해 태가 또 쓰러지면 여타 부실징후기업도 무더기 연쇄도산하면서 최악의 경 우 ‘공황’이 도래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특히 대기업이라고는 서너개밖에 없는 호남지역에서 아시아자동차에 이어 해태그룹마저 쓰러질 경우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지역의 반발이 거셀 것이라는 정치적 측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재경원은 이에 따라 서둘러 종금사를 찍어눌러 어음회수를 중단시켰고, 그대신 종금사의 민원을 대폭 받아들이기로 약속했다. 이로써 해태사태는 사흘 만에 어렵게 진정됐고 팽팽하던 경제위기감도 한풀 꺾였다. 금융계 일각에서는 정부의 미온적 대처에 불만을 가진 종금업계가 해태를 희생양 으로 골라 ‘실력행사’를 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게 아니냐는 해석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기업의 생명줄인 20조원대의 천문학적 기업어음(CP)을 틀어쥐고 있는 종금사들이 앞으로 계속 조용할지에 대해 서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

해태사태에서도 극명히 드러났듯이, 지금 우리 경제는 금융불안과 실물경 제 불안이 맞물리면서 서로 공을 상대방 코트로 넘기는 위기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연초부터 월평균 한개의 대기업이 쓰러지는 ‘월걷이 대 기업 부도행진’으로 실물경제에 대한 금융계의 위기감은 당연히 증폭됐 다. 그러나 실물경제의 불안은 실물경제 자체 내에서 그치지 않고 대기업 에 거액의 여신을 준 금융계 불안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심각한 것은 은행 부실여신의 급증이다. 과거에 재경원이나 은행은 무담보대출 부실채권만 부실로 여겨왔다. 대출기업이 부도가 나 이자를 못 받고는 있으나 그대신 부동산을 담보로 잡고 있는 이른바 ‘고정여신 ’에 대해서는 이를 문제삼지 않아왔다. 그러나 올 들어 잇따라 발생한 대기업 부도와 대기업들의 자구노력으로 부동산 매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부동산 시장거래가 중단되는 이른바 ‘복합불황’ 증후군이 분명해지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부동산 담보가 무의미해진 것이다. 윤증현 재경원 금융 정책실장은 최근 “고정여신까지 부실채권으로 합할 경우 우리 은행권의 부실채권 규모는 15조원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종전에 부실채권을 2 조원대로 계산하던 방식을 바꾼 것이다. 종전에 국내은행의 신인도를 더 없이 높게 평가하던 외국금융계에서 최근 은행의 안정성을 의심하기 시작 한 것도 당연하다.


전체 여신 60% 제2금융권 부실이 더 문제

더 큰 문제는 종금사 등 제2금융권의 부실화이다. 제2금융권은 현재 전체 여신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비대하다. 재경원 등이 업종 칸막이 정책을 고수한 결과, ‘30클럽’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종금, 리스, 파이 낸싱 등 각 부문에 평균 30개씩의 금융기관이 난립했기 때문이다. 은행권 에 담보를 잡혀 더이상 담보능력이 없는 기업들을 상대로 무담보 대출을 해주는 대신 고금리를 받아온 제2금융권은 과거 경기가 좋을 때에는 더없 는 호황을 구가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실물경제가 곤두박질치고 올 들 어 대기업이 연쇄도산하자, 빚을 받아낼 길이 없는 부실채권이 급증했다. 30개 회사가 난립하고 있는 종금사의 경우 자본금이 3조3천억원인 데 반 해 올 들어 발생한 대기업 부도 및 부도유예조치로 8조원대의 부실채권을 안게 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업계 전체로 볼 때 자본금이 완전잠식돼 파산지경에 몰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한푼이라도 부실채권을 줄이기 위 해 조금이라도 위험해보이는 기업에 대해 인정사정없이 자금 회수공세를 벌이고 있다.

이처럼 은행권과 제2금융권 등 전체금융권이 불안해지자 그 피해는 고스 란히 기업 몫으로 돌아가고 있다. 우선 피해를 보는 곳은 담보능력이 부 족한 중소기업이나 부실징후기업이다. 최근 해태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 듯, 종금사 앞에 이들의 목숨은 시쳇말로 ‘파리목숨’이나 다름없다. 대 기업도 예외는 아니어서, 종금사는 “정부가 안이한 대처를 계속할 경우 현대 삼성도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고 엄포를 놓을 정도다.

이 와중에 경제혼란을 결정적으로 부추기는 데가 또 한곳 있다. 다름아닌 강경식 부총리와 김인호 경제수석으로 대표되는 현 경제팀이다. ‘머리는 시장경제, 몸은 관치체질’이라는 세간의 비난에 잘 압축돼 있듯, 과거 개발독재시절의 경제기획원 출신인 두 사람은 실물경제의 위기를 제때 피 부로 못 느껴 ‘타이밍’을 놓치는 오류를 되풀이하고 있다. 기아사태로 실물 및 금융시장이 전무후무한 심리적 공황위기에 직면했음에도, 경제팀 은 도리어 심리불안을 부추기는 언행으로 일관해왔다.


대선정국과 맞불리면 회생불능 치명타

지난 8월16일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기아자동차 공장을 방문해 기아쪽 과 채권금융단간의 감정대립을 풀려는 중재를 해 각계가 환영일색일 때 “정치권의 개입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딴죽을 건 결과, 해외금융계로부 터 “정부·여당의 갈등을 볼 때 한국은 연말까지 무정부사태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아 환율과 금리가 급등하고 주가가 폭락하는 위기를 초래했던 것이 최근의 대표적 예일 것이다. 여기에 국제신용평가 기관인 스탠다드 앤드 푸어스(S&P)사의 신용등급 하향평가 움직임으로 제 일은행의 대외신임도가 급락해 신규채권을 발행할 수 없는 절대위기에 봉 착해 한은 등이 특융제공을 건의했음에도, 임기중에 특융제공이라는 티끌 을 남기지 않으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보신주의가 지나친 게 아니 냐는 비판마저 받고 있기도 하다. 지난 20일 삼성그룹의 기아인수추진 보 고서 유출로 인해 제기된 강 부총리의 기아사태 해결 부적격론도 경제불 안의 주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부가 정권말 무사안일과 보신주의에서 탈피해, 몸을 던져 경제위기를 수습하는 비장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아마도 혼미한 대선정국과 맞물 려 우리 경제는 회생불능의 치명타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게 금융계와 경 제계의 한결같은 우려다.

박태견/ 문화일보 경제부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04일 제 1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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