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추적

“강 부총리, 이젠 물러가시오”

(사진/경제부처 장관회의에 참석한 강경식 부총리(오른쪽에서 두번째). 삼성보고서가 폭로되면서 비난의 화살이 강 부총리에게 집중되고 있다.)

강경식 재정경제원 장관 겸 경제부총리가 사면초가에 몰렸다. 금융시장의 경색으로 재계 순위 24위의 해태그룹이 부도직전의 위기를 맞는 등 신용 위기는 공황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여기에 기아를 인수할 뜻도 능력도 없 다던 삼성그룹이 이미 지난 3월 기아자동차의 인수를 위한 계획을 검토했 으며, 이를 위해 “정부와의 공조필요성”을 제기한 내용의 내부보고서가 폭로되면서 “그러면 그렇지”라는 비난의 화살이 강 부총리를 향해 집중 되고 있는 것이다.


부도유예협약은 부도났다

삼미와 대농의 부도사태를 계기로 적용되기 시작한 부도유예협약제도 시 행이후 종금사들이 앞다퉈 돈을 거둬들이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 문제가 없을 것”이라던 정부의 장담은 이제 부도가 나버렸다. 종금사들 이 뒤늦게 여신회수를 중단하기로 선언했지만 정부정책에 대한 신뢰는 이 미 크게 떨어졌다. 강경식 경제팀의 정책집행은 “변형된 관치금융의 재 판”이라는 비난도 피할 수 없게 됐다.

사실 강 부총리의 취임초만 하더라도 현 경제팀의 개혁정책에 대해 국민 들은 우려를 하면서도 비교적 폭넓은 지지를 보냈다. 현재의 불황이 경제 구조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인 만큼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재벌경영구 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 것이다. 그러나 기아사태 이후 현 경제 팀의 실기는 계속됐다. 기아에 대한 지원과 함께 서둘러 금융위기를 수습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은 데도 정부는 “시장경제원리”만을 내세우 며 뒷짐을 지고 있다가 결국 경제전반으로 위기가 확대된 것이다. 기업은 물론이고 금융기관들도 이미 연이은 대기업 부도 및 부도유예로 부실채권 이 늘어나 해외차입마저 어려운 상태로 빠져들어갔다.

게다가 때마침 공개된 삼성의 보고서는 현 경제팀을 더욱 곤혹스럽게 하 고 있다. 국민들은 “기아 인수를 위해 정부와의 공조를 더 공고히 할 계 획”이라는 내용이 담긴 삼성그룹 보고서를 놓고 현 경제팀과 삼성과의 유착의혹을 기정사실로 믿는 분위기다. 지난 94년 부산신호공단 유치위원 장으로 삼성의 자동차사업 진출을 적극 추진했던 강 부총리의 삼성 비호 의혹은 그동안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때문에 이 보고서는, “정부가 유 독 기아에 대해서만 진로, 대농 등 부도유예협약 적용 대상 기업과 다른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다른 속뜻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기정사실 화 하면서, 강 부총리의 퇴진 요구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기아그룹 부장급 이하 일반관리직 사원들의 모임인 종업원 비상재건대책 위원회는 22일 ‘삼성의 보고서 파문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발표해 “ 그동안 소문으로 나돌았던 삼성과 정부 경제팀과의 커넥션의 일부가 드러 났다는 점에서 기아인과 국민들은 분노와 배신감을 느낀다”며 삼성의 공 개사과와 함께 강 부총리의 즉각사퇴를 촉구했다. 전국자동차산업노동조 합연맹도 “기아사태가 정부와 삼성간의 치밀한 각본에 의해 일어났다는 것이 입증됐다”며 “공공연한 삼성맨으로, (삼성의) 기아인수를 주도하 고 있는 강 부총리는 즉각퇴진해야 한다”며 가세했다.

재경원은 적극적인 해명에 나섰지만, 한번 붙은 불길은 쉽게 잡히지 않고 있다. 강 부총리가 중국 방문으로 자리를 비운 23일 강만수 재경원 차관 은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강 부총리는 삼성보고서에 대해 아는 바도 없 고 알 수도 없으며 어떻게 자신이 개인기업의 활동에 대해 알 수 있겠느 냐고 반문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 “사기업의 내부보고서가 정부에 보고되는 일은 없다”면서 “삼 성 실무진의 내부 검토보고서를 가지고 아무 상관도 없는 정부와 연계시 켜 국민을 호도하는 것은 정부정책의 신뢰성을 저하시켜 우리 경제의 어 려움을 더욱 가중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심히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말 했다. 재경원 관계자들은 “삼성의 보고서가 작성된 날짜(3월4일)가 강 부총리의 취임일보다 앞선 것은 이 보고서가 강 부총리와는 아무런 관련 이 없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삼성의 보고서에 쓰여 있는 시나리오가 계획대로 실현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삼성과 정부의 유착설은 세간의 의혹만큼 깊은 정도는 아니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그러나 우연의 일치이든 의도된 것이든 기아에 대한 정 부의 정책이 결과적으로 ‘기아죽이기’로 여론에 비치고, 이로 인해 기 아사태가 경제 전반에 엄청난 혼란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강경식 경제팀에 대한 비난은 쉽게 수그러들 것 같지 않다.


재경원, 기아사태 해법 변화없다

그런데도 재경원은 기아사태의 해법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변경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밝힘에 따라 사태는 더욱 꼬여들고 있다. 강 차관은 이날 “기아그룹의 채권은행단이 김선홍 회장 등 임원들의 무조건적인 사임서 제출을 요구한 것은 추가지원에 대한 채권확보를 담보하고 노조에 임금 및 인원감축 동의서를 요구한 것과 형평을 맞추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 라며 “기아그룹 김 회장의 사퇴를 전제로 한 자금지원”이라는 기존 입 장을 재확인했다. 이는 재경원이 지금까지 고수해온 기아사태의 해법을 바꾸자니 항간의 유착의혹을 사실상 인정하는 셈이 된다는 옹색한 처지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기아살리기 범국민운동연합은 강 차관의 발언소식이 전해진 이날 오후 서울역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국민들이 믿지도 않는 형식적 발표만 하는 현 경제팀의 강경식 부총리를 포함한 책임자들을 즉각 퇴진 시키라”고 요구했다. 기아그룹 협력회사연합 비상대책위도 이달 말까지 정부의 대응책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을 경우 부총리의 퇴진운동에 나서겠 다고 천명했다.

물론 강 부총리의 퇴진이 궁극적인 문제해결을 가져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 그가 당직을 버리고 현 정부의 마지막 경제팀을 이끌 인물로 선택된 점에서나, 강 부총리를 대체할 마땅한 인물이 없다는 점에서 그의 퇴진주장은 그동안 실현가능성도 없는 것으로 간주돼 왔다. 그러나 강 부총리에 대한 비난은 이제 여당 안에서도 거세게 일고 있다. 신한국당 안에서 “도대체 선거를 치르자는 것이냐, 말자는 것이냐”라는 불만의 목소리가 공공연히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신한국당은 기아사태 가 몰고온 경제적 파장이 대선에서 엄청난 감표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크게 우려하면서, 서둘러 대책을 마련할 것을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


표 날아간다 신한국당 대책 마련 부심

신한국당은 23일 여의도 당사에서 이해구 정책위원회 의장 주재로 경제종 합대책회의를 열고 환율, 금리인상, 자금경색, 기아사태 등 일련의 경제 적 난제들에 대한 정부의 미온적인 대처방식을 지적하면서, 한국은행 특 별융자를 포함한 경제안정 특별조치를 정부에 요구했다. 이회창 대표가 전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경제문제에 대해 정부 대처가 너무 안 이한 것 아니냐”고 비판한 것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 의장은 특히 이 대 표의 전날 발언에 대해 재경원의 일부 관료들이 “정치논리로 경제논리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데 대해 “현재 관료사회에서는 정치인이 경제문제를 언급하는 것을 정치논리개입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 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자세”라며 정면으로 비난했다.

재경원은 25일 한국은행의 제일은행 특별융자, 종금사에 대한 국고여유자 금 지원 등을 포함한 금융시장 안정대책을 뒤늦게 내놓았다. 사태의 심각 성을 뒤늦게나마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재경원은 이번 금융불안의 도화 선이 된 기아사태와 관련해서는 “인원·임금 감축에 대한 노조의 동의가 있거나 경영진 사표를 포함한 무조건적인 책임경영각서를 제출할 경우 기 아쪽에 추가자금을 지원할 것”이라고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이에 따라 기아사태는 앞으로도 장기화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여 당에 등을 돌리고 있는 여론을 수습해야 할 당과, 기존의 정책을 바꾸기 에는 마땅한 명분이 없는 정부 사이의 갈등의 불씨는 계속 남아있는 것이 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04일 제 1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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