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997년07월17일 제 166호 한겨레21

“우리 골프장은 시장바닥”

지난 4월 서울 북부지청은 한 학원장을 불구속 입건했다. 혐의는 상습도 박. 검찰에 따르는 그 학원장은 하룻밤 내기바둑으로 46억원을 잃었다고 한다. 처음엔 한판에 1백만원을 걸고 바둑을 뒀으나, 돈을 계속 잃자 막 판 역전을 노리고 판돈을 2배씩 올리다보니 5억원까지 뛰었다. 결국 6시 간 동안 학원장은 46억원을 잃고 말았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함정의 시작 은 다름아닌 내기골프였다. 학원장은 골프장에서 만난 사기꾼들과 한 타 에 1만원짜리 내기골프를 치다 올가미에 걸려든 것이다.


캐디를 하인처럼 부리는 사람들

골프인구는 늘어났지만 골프문화는 오히려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는 지적 이 많다. 골프장에서 큰 소리로 떠들고, 캐디에게 음담패설을 던지고, 심 지어는 경기 도중 술을 마시는 골퍼들이 많다. 내기골프는 낙후한 우리 골프문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로 거론된다. 한 골퍼는 “우리의 골프 장은 시장바닥이나 다름없다”고 극언을 서슴지 않는다. 그는 “골프가 순수한 스포츠라기보다는 부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오염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실제 그의 지적에서 자유로운 골퍼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일부 골퍼들은 골프에 대한 애정보다는 골프가 주는 사회적 특권의식을 누리기 위해 골 프장을 찾는다. 그래서인지 골프장은 돈많은 사람들의 사교장이라는 인상 이 좀체 사그라들지 않는다. 골프장의 클럽하우스와 목욕시설은 세계 어 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화려함을 자랑한다. 특히 골프장 주차장 은 고급 외제승용차의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소형차를 타고 가면 괜히 주눅이 들 정도다. 게다가 한국 골프장에 특별히 발달했다는, ‘그늘집’ 이라는 간이음식점은 지갑이 두둑하지 않고서는 들어가기 힘들다.

골퍼들의 특권의식은 캐디를 대하는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이른바 골프 선진국에서는 캐디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골프를 치려면 손수 골프채가 든 카트를 끌고 필드를 도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한국의 골퍼들은 카트 를 끌고 골프를 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통상 한 골프장에는 주 말 캐디와 하우스 캐디(전속 캐디)를 포함해 3백∼4백명의 캐디가 일한다 . 캐디는 골프장에서 골퍼의 유일한 동반자다. 골퍼는 오로지 캐디의 조 언과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만 규정돼 있다. 골프 규칙 어디에도 캐디는 동반자이지 부하나 하인이라는 구절이 없다. 그러나 그들을 부속물로 여 기고 함부로 대하는 골퍼들이 많다. 어떤 골퍼들은 동료가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캐디한테 한 타 줄여달라는 소리를 예사로 한다. 게다가 캐디 를 대하는 얼굴을 보면 너와 나는 같은 부류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는 표정이 역력하다. 수치스러움을 느낄 정도의 야한 음담패설도 버젓이 건넨다.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골프장의 한 간부는 “제법 얼굴이 알려진 사람들조차 캐디에게 낯뜨거운 추태를 보여 놀랄 때가 많다”고 말한다. 캐디를 마치 잔심부름꾼처럼 대하는 데에는 지위의 높고낮음이 없다는 게 그의 오랜 관찰결과다. 한 캐디는 “우리나라 골퍼들은 대부분 캐디에게 권위적이다. 그들은 캐디들을 접대부로 보고, 캐디들은 그들을 팁이나 주 는 손님으로 본다”고 비아냥대기도 했다.


접대골프가 유난히 많은 나라

골프는 신사의 스포츠라지만 우리나라에선 항상 뒷전으로 밀리는 게 골프 예의다. 이런 예의불감증은 골프를 배우는 과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심 자들이 골프를 배우려면 우선 찾아가는 곳이 실내연습장이다. 여기서 프 로들의 지도를 받으며 기본동작과 샷을 배운다. 프로들은 의당 우선 골프 규칙과 골프예의를 가르친 뒤 실기를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프 로들은 그런 과정을 건너뛴다. 바로 실기에 들어가 레슨을 마치는 경우가 많다. 기본예의를 배우지못한 초심자들이 골프장에 나가 실수를 범하지 않을 수 없다.

골퍼들은 사정이 여기까지 이르게 된 데는 골프장의 책임도 크다고 지적 한다. 미국과 일본의 골프장에서는 골퍼가 규칙을 어기거나 예의를 지키 지 않으면 가차없이 그를 제명한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골프장은 무르 기 짝이 없다. 골퍼가 잘못을 저질러도 못본 척 눈을 감아주는 경우가 태 반이다. 골프장이 회원의 권익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킹 하나 제대로 보장해주지 못하는 골프장으로서 회원들에게 말발이 안 서는 것이다. 한 골프장 관계자는 “사실 골프장 규칙을 곧이곧대로 적용하면 남아날 골퍼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랬다간 골프장은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기껏해야 넌지시 충고하는 게 고작인데, 우리나라 골퍼들은 그것 조차도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게다가 우리나라처럼 접대골프가 많은 나라가 없다. 내로라하는 기관에서 도 깎듯이 모시는 판인데, 골프장으로서는 골퍼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정치 경제 행정 언론 군 경찰 정보기관 법조계 등이 이리저리 얽히면서 접대골프판을 벌인다. 물론 기업에서 다른 관계자를 접대하는 경우가 많다. 한 기업체 홍보책임자는 그런 접대골프를 “쓸개까지 다 내 주는 봉사”라고 말한다. 초청자가 피초청자의 그린피는 물론이고 캐디피 에 그늘집 비용까지 몽땅 부담한다는 것이다. 골프가 끝난 뒤엔 술값에다 상패까지 안긴다. 버디(규정타보다 하나 적은 타수로 홀인하는 것)를 기 록하면 버디패, 이글(규정타보다 두개 적은 타수로 홀인하는 것)을 치면 이글패가 주어진다. 티샷에서 공을 가장 멀리 치면 롱기스트패요, 홀컵에 가장 가깝게 치면 니어리스트패다.


골프채가 흉기로 변하기도

내기 골프는 포커를 방불케 한다. 각 홀마다 내기골프를 하느라 열을 올 린다. 홀매치, 라스베가스, 스킨스게임, 스트로크플레이 등 온갖 내기골 프 방법이 동원된다. 보통 한 타에 1만원을 거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다 따블판이 생기고 따따블판이 생긴다. 내기골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골프 장의 외침은 공허할 뿐이다. 퍼팅(홀컵에 공을 집어넣는 것)이 끝나자마 자 그린 위에서 점수를 계산하고 때로는 큰 목소리로 다투면서 수표를 주 고받는 모습이 펼쳐진다. 심지어는 골프채가 흉기로 변하기도 한다. 한나 절에 수십만원을 잃고 따는 골퍼들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이러다보니 전문적인 사기골프꾼까지 생겨났다. 적당한 대상을 물색해 처 음 몇판은 일부러 돈을 잃어주다가 결정적일 때 거금을 챙기는 전문가들 이다. 지난 93년 6월 사업가 김아무개(45)씨는 강원도 고성군 설악프라자 골프장에서 사기골프단에 걸려 하루에 1억2천만원을 잃었다. 한 타에 1백 만원의 내기골프를 친 끝에 아파트 한채 값을 날려버린 것이다. 한 프로 골퍼는 “사기골프꾼들은 우리나라의 비뚤어진 골프문화가 낳은 부산물” 이라고 지적했다.

유강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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