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재에서
1997년07월17일 제 166호 한겨레21

쿠데타도 ‘리세트’할 것인가

대개의 컴퓨터에는 ‘리세트’라는 단추가 있다. 시스템이 불안정하거나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시동 단계의 다양한 검색 및 점검 과정을 일부 건너뛰게 해주는 편리함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다시 시작한다’는 낱말의 의미에서 크 게 벗어나지 않는다.

게임 프로그램에도 이같은 기능이 대부분 갖춰져 있다. 바둑이나 카드게 임에서 도전자가 도저히 이기기 힘들 때나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을 경우 똑같은 내용의 게임을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있는 재시합 기능이 그것이다 .

최근 일본에선 한 중학 3년생이 저지른 엽기적 살인사건을 계기로 바로 이 ‘리세트 기능’이 주목받고 있다. 학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을 따르던 동네 어린이를 살해한 뒤 토막내 버렸고 이어 경찰을 야유하는 메 모까지 남기는 당돌함을 보였다. 이 충격적인 사건에 마주한 정부와 학계 는 소년의 심리상태를 진단하느라 법석이었다. 이때 제시된 가장 유력한 병리현상이 바로 리세트증후군이다.

이 증후군은 잔혹한 범죄를 소재로 한 각종 컴퓨터 게임이나 비디오 출판 물이 범람하면서 나타났다고 한다. 이런 오락물에 빠져들면 ‘게임을 언 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듯이 현실도 언제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 다’는 착각에 빠져들어 현실과 게임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학생에게서는 살인이나 공포를 소재로 한 비디오나 만화 수십점과 컴퓨터 게임 등이 발견됐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중고교에 범람하는 학교폭 력이 대부분 문제의 일본 학생에게서 발견된 만화나 게임을 모방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을 모두 리세트증후군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들이 현실과 만화 속 이야기를 혼동한다거나 만화나 게임을 현실에 적 용하려는 점에서 예외로 인정할 수도 없다. 학생들이 언제든 이 폭력의 게임을 그치고 정상적인 현실생활로 돌아올 수 있다고 믿는 점에서는 특 히 그렇다.

문제는 이런 병리현상이 미성년자들에 그치지 않고 최고권력을 추구하는 이 나라 지도자들의 행태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이다. 물론 이들의 경우 자 신의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한 기회주의적 변신이나 위선의 성격이 강하다 는는 점에서 청소년들과 다르다. 그러나 이들이 선거를 게임의 논리로만 파악하고 있는 것이나 게임 과정에서 저지른 일들은 끝나면 모두 원인무 효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점은 리세트증후군의 전형적인 병리현상의 하나 다.

신한국당 후보경선 과정에서 경쟁적으로 튀어나오는 박정희 예찬론은 그 좋은 실례다. 유신정권 때 ‘소수의견’으로 법적 정의를 지키려 했다는 이회창 후보는 ‘박정희는 나라의 근대화를 이룬 경략가요 경세가’라고 말했다. 영남후보를 자임하는 이수성씨는 5·16쿠테타를 ‘혼란스런 나라 를 구하기 위한 결단’이라고 찬양했다. 2년 전 서울시장선거 때 유신정 권과의 관계를 반성하느라 정신 없었던 박찬종 후보는 아예 ‘박정희 전 대통령을 본받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유신때 민주화운동 경력을 자랑 삼았던 이인제씨마저 ‘나는 리틀 박정희가 아니라 뉴 박정희’라고 했다 . 그는 특히 박정희처럼 보이기 위해 분장사까지 동원했고 경선 포스터엔 박정희 닮은꼴로 나섰다. 내란목적 살인 등의 죄를 선고받고 복역한 지 채 3개월도 지나지 않은 전두환 노태우씨에 대한 사면 논의도 마찬가지다 . 여기엔 야당도 끼어 있다. ‘사과한다면’이란 전제가 붙어 있긴 하지 만 그것은 그야말로 사족일 뿐이다.

하지만 이같은 입장에 대해 이들은 사석에서 ‘선거용’이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표 모으기용이라는 말이다. 선거라는 게임만 끝나면 즉 각 다시 시작할 준비가 돼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런 논의와 행태가 현실 에 가져올 치명적인 영향은 부연할 필요도 없다. 이는 쿠데타와 인권유린 , 수천억원의 부정축재 그리고 대규모 살상을 용인한다. 현실은 때문에 이런 범죄를 언제든 '리세트'할 준비를 갖춘다.

한겨레21 한겨레21

편집장 곽병찬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17일


커버스토리 포커스 문화시대 특집 지난호 전체보기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