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1997년07월17일 제 166호 한겨레21

유년의 기억을 깨운다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다. 옛 사람을 찾아주는 이 프로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건 ‘첫사랑’ 연인(?)인데 대부분 초등학교 소꿉친구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당시엔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부끄러웠던 이야기, 토닥거리다 다투기도 했고, 졸업하면 서 소식이 끊겼다는 둥 내용은 누구나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시청 자들은 그 뻔한 이야기에 목을 늘어뜨리고 있다.


교사가 들려주는 감동적인 삶의 풍경

최근 출간된 오수의 단편만화집 <느티나무>(서울문화사)는 그런 이야기다 . 어릴 적 모교로 부임한 시골 초등학교(이름도 정겹다. ‘산촌국민학교 송천분교’) 선생을 화자로 자신과 주변사람들의 잔잔한 삶이 교정 가운 데 서 있는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수채화처럼 그려진다. 10편의 단편 중 일부를 펼쳐보자면.

목수인 아빠의 도시락 당번인 7세난 향신이는 매일 목공소에 들러 신문지 를 펴고 아빠와 함께 점심을 먹는 게 유일한 낙이다. 그런데 어느 날 점 심대접을 받은 아빠가 벌써 점심을 먹어버려 도시락을 가져온 향신이는 울음을 터뜨린다. 아빠는 딸을 달래고 다시 가져온 도시락을 먹기로 하는 데. 둘이는 능청스럽게 “아빠, 도시락 왔어요” “이런, 벌써 점심시간 이 됐나? 우리 공주 아니면 아빠가 점심을 거를 뻔했구나” 하고 일상의 대화를 잊지 않는다. 까칠까칠한 수염턱으로 보드라운 딸의 낯을 부비는 세번의 뽀뽀까지도. 그리고 이젠 곁에 없는 아버지를 그리는 초등학교 교 사 향신이의 말. “아버진 배가 부르셨을 텐데도 내가 갖고 간 도시락을 깨끗이 비우셨어요.”(<느티나무> 중)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우철이에게 할머니는 흑염소 새끼를 사준 뒤 거 짓말을 한다. 흑염소가 다 자라면 서울 큰병원에 있는 엄마가 올 거라고. 그리고 생일 때마다 엄마가 보낸 거라며 선물을 건넨다. 그러나 우철인 엄마가 하늘나라에 계신 것을 언젠가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할머니의 거 짓말이 밝혀질까 걱정되어 항상 흑염소를 데리고 다니며 모른 척 엄마의 선물을 더욱 애타게 기다렸을 뿐.(<흑염소> 중)

이외에도 자신을 어미로 알고 졸졸 따라다니던 새끼오리 ‘꽈꾸’를 집에 온 매형에게 대접하느라 잃은 아이와 배가 고파 반 친구의 옥수수밭에서 몰래 옥수수를 따다 들켜버린 아이 등 어렵던 시절 가슴아픈 이야기들이 너무 아름답다. 아이는 자라 나중에 ‘꽈꾸 오리농장’을 세우나 절대 오 리고기를 먹지 않고, 한 아이는 옥수수 그림만을 그리는 화가가 된다. 그 리고 저는 다리를 끌고 간이역에서 사과를 팔며 이제나저제나 집나간 아 들을 기다리는 늙은 어머니의 가없는 마음까지 <느티나무>에는 오래 전 고향에 두고온 동심과 애틋한 정성이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만화판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인 셈인데 우리 흙냄새가 배어 더욱 가 슴에 와닿는다. <느티나무> 스토리작가 최극락(39)씨는 “시골은 우리나 라 사람 누구에게나 ‘마음의 고향’ 아닌가? 사람들이 이 만화를 보고 따뜻한 마음을 한번 느껴볼 수 있었다면 된다”고 말했다. 한편 <느티나 무>에는 “두둥실 흰구름이 대왕산을/ 머리에 이고 단숨에 달려온다/ 눈 감으면 미루나무 발밑으로 와르르/ 흘러가는 무시울 소리” “휴일의 운 동장 위에서 구름은 한가로이 졸고/ 새들은 재재거리며 적막한 오후를 쪼 아댄다” “새벽달은 대왕산 옆구리에 걸터앉아/ 아침을 기다리고…” 등 일반 만화에선 보기 힘든 시적 언어가 풍성하다. 또한 인물들의 선한 표 정과 농촌정경은 서정을 더욱 짙게 만들어 준다.


만화책 사이로 눈물이 떨어진다

어린 날의 추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폭력과 섹스로 얼룩진 만화시장 에서 <느티나무>는 어릴 적 흑백 사진첩을 들추듯 ‘순수’ 이전 아련한 유년의 기억들을 끄집어내 가슴 한쪽에 커다란 구멍 하나 뚫어놓고, 그 사이로 바람을 휘휘 날려보낸다. 그리고 보슬비처럼 마음을 적신다. (문 의: 02-799-9169)

권태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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