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여성
1997년07월17일 제 166호 한겨레21

조선의 시인 이옥봉...사랑에 꺾인 애달픈 시심

조선 인조 때의 일이다. 승지 조희일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 원로대신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조원을 아느냐”는 물음에 조희일이 부친이라 대답하니, 원로대신은 서가에서 <이옥봉 시집>이라 쓰인 책 한 권을 꺼내보였다. 조희일은 깜짝 놀랐다. 이옥봉은 아버지 조원의 소실로 생사를 모른 지 40여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옥봉의 시집이 어떻게 해서 머나먼 명나라 땅에 있게 되었는지 조희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 이었다. 원로대신이 들려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40년 전쯤 중국 동해안에 괴이한 주검이 떠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너무 나 흉측한 몰골이라 아무도 건지려 하지 않아 파도에 밀려 이 포구 저 포 구로 떠돈다는 것이었다. 사람을 시켜 건져보니 온몸을 종이로 수백겹 감 고 노끈으로 묶은 여자 시체였다. 노끈을 풀고 겹겹이 두른 종이를 벗겨 냈더니 바깥쪽 종이는 백지였으나 안쪽의 종이에는 빽빽이 시가 적혀 있 고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 씌어 있었다. 읽어본즉 하나같이 빼어난 작품들이라 자신이 거둬 책을 만들었다고 했다.

온몸을 시로 감고 죽은 여인 이옥봉. 이옥봉은 조선 명종 때 충청도에서 왕족의 후예 이봉지의 서녀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뛰어난 재주 를 보인 옥봉은 신분의 굴레로 첩살이밖에 못함을 알게 되자 결혼에 대한 꿈을 버리고 서울로 갔다. 옥봉은 장안의 내로라 하는 명사들과 어울리며 단종 복위운동에 뛰어들었고, 곧 시귀나 짓는 선비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옥봉은 조원이란 선비를 사랑하여 첩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첩살이가 싫 어 결혼을 거부했던 그였지만 사랑 앞에서는 약해진 모양이다. 한데, 조 원은 옥봉을 받아들이는 대신 앞으로는 절대 시를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 라 했다. 여염의 여인이 시를 짓는 건 지아비의 얼굴을 깎아내리는 일이 라면서. 옥봉은 맹세했다. 자신의 시는 외로움과 허망함의 발로였으니 지 아비를 얻으면 시를 쓰지 않아도 좋으리라고.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조원 집안의 산지기 아내가 찾아와 하소연했다. 남편이 소도둑 누명을 쓰고 잡혀갔으니 조원과 친분이 두터운 파주목사에 게 손을 좀 써달라 했다. 사정을 들어본즉 아전들의 토색질이 분명했다. 옥봉은 파주목사에게 시 한수를 써보냈고, 산지기는 무사히 풀려났다. 그 러나 이 일로 옥봉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조원이 “약속을 지 키지 않는 여자와는 살 수 없다”며 내친 것이다.

뚝섬 근처에 방 한칸을 얻어 지내며 옥봉은 조원의 마음을 돌려보려 애썼 으나 허사였다. 조원과의 약속을 지키느라 10년 가까이 시혼을 억눌러오 다가 산지기를 위해 한수 지어준 일로 쫓겨나다니. 옥봉으로서는 야속하 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으리라. 옥봉은 애통한 마음을 담아 시를 읊고 또 읊었다. 더이상 참을 까닭도 없었으니까.

평생 이별의 한이 병이 되어(平生離恨成身病)

술로도 못 고치고 약으로도 다스리지 못하네(酒不能療藥不治)

이불 속 눈물이야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과 같아(衾裏泣如氷下水)

밤낮을 흘러도 그 뉘가 알아주나(日夜長流人不知)

조원을 단념한 옥봉은 평소 가보고 싶었던 중국으로 가 마음껏 시심을 펴 보려 했나 보다. 그리고 자신의 시로 몸을 감고 낯선 바다에 뛰어들었나 보다. 여성을 가정 내 존재로 규정하고 그 틀을 벗어나는 여성은 천시하 거나 사회적 보호 밖에 두었던 조선시대의 여성관에 죽음으로 항의한 셈 이다. 사랑을 위해 시를 포기했지만 자신의 삶은 결국 시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침묵으로 웅변하면서.

박은봉/ 역사연구가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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