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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지성 |
1997년07월17일 제 1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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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광/ 과학세대 대표
우리들은 과학이나 과학적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개 무언가에 조작을 가하 든가,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키는 것을 머리 속에 떠올리게 마련이다. 실 제로 과학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연에 조작을 가하고 , 그 조작의 범위를 점차 확장시켜서 그 이전 시대까지 신(神)의 영역에 속했던 많은 부분들을 인간의 조작 대상으로 편입시켜왔다.
그중 하나가 이른바 생식기술(reproductive Technology)이다. 생식기술은 인공착상, 미성숙아의 생존술과 같은 비교적 낮은 수준의 기술에서부터 흔히 시험관 아기라 불리는 체외수정, 저온보관된 난자를 이용한 수정기 술, 그리고 최근에는 태아의 기형이나 유전병 유무를 검사하는 유전자 검 사와 같은 고도의 기술로까지 그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물론 하늘이 내린 벌로까지 표현되는 불임의 고통을 당하는 이들에게 생 식기술의 발달은 복음(福音)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생식기술은 다른 한편으로 태아의 성(性)감별과 같은 부정적인 문제점을 몰고 왔다. 사실 유전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과연 우리가 생식이라 는 과정에 어느 정도까지 개입해야 하는가?”라는 좀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해왔다. 장구한 생물의 역사에서 생식, 즉 인간을 포함하는 많은 생 물의 생식 방식인 유성생식(有性生殖)이 언제, 어떻게, 그리고 왜 진화하 게 되었는지는 아직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수컷과 암컷, 남자와 여자 라는 양성(兩性)을 필요로 하는 유성생식은 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단성( 單性)생식에 비해 무척 복잡하며, 많은 비용(cost)을 요구한다(가령, 단 적인 예로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기까지 들어가는 엄 청난 에너지와 비용을 생각해보라).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바로 그처럼 복잡한 과정 속에 진화를 추동시키는 원동력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미국 상원(上院)의 한 소위원회에서 열린 생물복제에 대한 토론 회에서 보스턴대 생물윤리학 교수인 조지 안나스는 “우리에게는 아기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날지 여부, 심지어는 태어날지 여부에 대해서조차 아 무런 발언권이 없다”라고 말했다. 불임이나 사산(死産)의 고통을 직접 겪은 사람들은 펄쩍 뛸지도 모르지만, 저급한 기술수준의 개입에서 고급 한 유전자 수준의 개입까지를 포함해서 생식에 대한 모든 유형의 개입이 장래에 사람이라는 종(種) 전체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메릴랜드대 법학과의 카렌 로덴버그 교수는 “A가 B보다 낫다(기형아보다 정상아가 낫다), 특정 유전자가 다른 유전자보다 낫다는 식의 결정을 인 간이 내리려 할 때, 불확정성이 사라지고 다양성이 파괴된다”라고 말한 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인간이 개입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아직 기술적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리 과학이나 기 술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미정성, 불확정성으로 남겨두어야 할 부분은 그대로 놔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신(神)의 영역에 속해 있다 ”고 수사적으로 표현하는 많은 영역들에서 바로 이 불확정성이 주요한 작동기구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사람이라는 종이 진화 를 계속하고, 지구상에서 존속할 수 있으려면 다양성이라는 토대가 없이 는 불가능하며, 그 다양성은 불확정성의 유지라는 메커니즘을 가능한 한 다치지 않고 보전(保全)할 때에만 지켜질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복제양 돌리 사건으로 불거져 나온 유전자복제의 경우에도 같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에 따르면 사람의 전체 DNA 염기배열 중에 서 90 내지 95%는 직접적인 기능을 갖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러니까 사람의 DNA 염기배열 중에서 단백질을 만들거나 사람의 특성에 관 여하는 유전자는 5 내지 10%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직은 그 나머지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직접적인 기능을 갖지 않는다고 해서 불필요하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생식기술처럼 지극히 미묘한 사안에서 ‘어디까지 개입할 것인가’의 문 제를 다루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과학적’이라는 말을 ‘무언가에 조작을 가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고정관념에서 한시바삐 벗어나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할 것이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