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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1997년07월17일 제 1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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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일/ 경남대 교수·사회학
우리 사회가 외형적인 성장과 발전의 이면에서 속으로 얼마나 철저하게 곪아 터지고 있는지를 새삼 확인시켜 주는 일들이 연일 벌어지고 있다.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에서부터 한보사태, 김현철 사건 등은 이제 얼치기로 겨우겨우 봉합돼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여파로 문민정 부의 권위와 정당성은 이미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다. 제대로 된 사회라면 벌써 과도적 ‘정권교체가’ 이뤄졌어야 마땅했을 것이지만, 일부를 제외 하고는 누구도 ‘정권퇴진’을 적극 주장하지 않고 있는 것이야말로 ‘대 안부재의 한국사회’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겠다.
문제는 인간공학
20조원에 이르는 막대한 국고가 뻔히 눈뜨고 보는 앞에서 뭉텅뭉텅 사라 져가고 있는 총체적 부실의 고속전철사업을 놓고도 완전히 속수무책인 사 회, 그것이 우리 사회다. 교육방송의 간부가 불법 과외와 탈세, 뇌물상납 으로 구속되고 교사인 그 부인이 지니고 있던 ‘촌지 치부책’이 TV를 통 해 전 국민에게 알려져도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는 사회가 우리 사회다. 수백억원씩의 예산을 들여 전국 각지에 다이옥신 생산공장을 짓고 있는 사회, 핵발전소를 지었고 앞으로도 계속 지을 지역이 지진지대임을 감추 기 위해 국가 기관이 지진 ‘진앙지’를 속이고 은폐하는 사회, 이 사실 이 밝혀져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핵발전소 건설 은 아무 문제없이 계속될 것이니 국민 여러분은 안심하시고 생업에 열중 하라 말하는 사회, 그것이 우리 사회다.
필자와 같은 대학에 재직하면서 환경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환경보호학 전 공의 한 교수는 연전에 한 강연회에서 쓰레기 소각장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기술적으로 무해한 소각장을 만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 은 아니다. 리사이클링(재활용) 체제가 만들어지지 전에는 매립보다는 소 각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소각장 건설을 반대하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그것은 사람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1천도 이상의 고 열 처리가 필요한 쓰레기를 남몰래 6백도에 소각 처리하고 그만큼의 연료 비(유류비)를 부수입으로 챙길 수 있는 사회가 우리 사회다. 시민 감시에 도 한계가 있다. 어떻게 믿고 맡길 수 있는가?” 기술은 믿을 수 있어도 그 기술을 다루는 사람을 믿을 수 없다면 그것은 더이상 쓸 수 있는 기술 이 아닌 것이 된다. 문제는 기술공학이 아니라 인간공학, 사회공학인 셈 이다.
우리 사회가 만성적인 부패와 불신의 구조를 껴안고 신음하는 사회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나, 누구도 자기 자신이 그 부패와 불신의 한 부분임 을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지적도 많이 있었다. 가톨릭 교회에서 “내 탓이 오”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 회의 병리 구조는 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 도 한다. 이제는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라는 식의 도덕적 자포자기의 상황에까지 다다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 것이다. 우리 국민이 도 덕적으로나 개인윤리적으로 아직 덜 성숙해서 그렇다고 볼 것인가? 그렇 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 사회는 그나마 개인적, 공동체적 도덕과 윤리에 의해 이 정도라도 지탱되고 있는 사회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는 개인적 도덕이 나 윤리의 문제로 더이상 환원할 수 없는 집단적, 사회적 도덕과 윤리의 파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일찍이 라인홀트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 도덕적 사회’의 역리를 지적한 바 있지만, 이 역리를 교정하는 방법에 별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철저하게 ‘불신에 기초한 제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최고 권력자의 선의지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 것을 통제할 장치들을 제도화하는 것, 정치인들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단 한푼의 검은 돈으로도 감옥에 갈 수 있음을 경고하는 정치자금규제법 을 만드는 것, 정부와 공직자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위임된 권한에 상응하는 감독과 책임규명과 처벌의 장치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 기업의 도덕성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거두어 가는 이윤에 상응 하는 규제와 감시의 틀을 강화하는 것, 군대와 경찰과 정보기구의 공복의 식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폭력’의 행사범위와 한계를 철저하게 규율하는 것, 학교와 교사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들이 ‘스승의 권위’의 이면에서 벌일 수 있는 비리들을 봉쇄할 제도를 만들어 나가는 것, 이런 것들이 곧 불신의 제도화의 내용이 될 것이다.
대충 눙치고 넘어가지 말자
이 과정에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그 하나는 “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라거나, “이건 우리 모두의 문제” 라거나, “대다수는 아닌데 일부가 문제”라는 식으로 눙치고 넘어가고자 하는 문제 떠넘기기다. 다른 하나는 “차라리 모든 규제를 풀어라, 시장 에 맡겨라”는 탈규제론이다. 그것이야말로 현재의 조건 속에서 최대의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기득권자, 강자들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불행한 일 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회들이 그러했듯이 우리 사회 역시 불신의 제도화 를 통하지 않고서는 믿음의 사회로 나아가기를 바랄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동안 우리는 너무 서로를 믿고 싶어만 했 는지 모른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