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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
1997년07월17일 제 1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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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석(46)은 장사꾼이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잘 나간다는 국산 청바 지 ‘잠뱅이’를 판다. 마고자에 ‘블라우스’라는 상표를 붙인 것 같은 희한한 브랜드다. 업계에서 부러움을 살 만큼 성공사례로 꼽힌다. 장사 4 년만에 전국에 70여개의 대리점을 거느리게 됐고, 얼마 전엔 서울 강남 대로변의 번듯한 건물로 이사갔다. 게스니 캘빈클라인이니 하는 외제 청 바지가 휩쓰는 판에, 그것도 장사가 안 돼 죽겠다고 모두가 아우성치는 불경기에, 그는 거꾸로 부자가 됐다.
전태일이 남긴 것
6·25 전쟁통에 태어났으니 어릴 적 고생은 당연했지 싶다. 부모님은 농 사지어 빚 갚고, 다시 빚 얻어 농사짓는 형편이었다. 끼니마다 오르는 꽁 보리밥에는 고구마가 수북했다. 그나마 떨어지면 콩이 보리알만큼 섞였다 고 한다. 그때 어머니가 군것질거리로 주던 술지게미 맛은 지금도 혓바닥 에 감친다. 그래도 형과 누나들처럼 허구한 날 배를 곯지는 않았으니 천 만다행이다. 그들은 밥굶기를 예사로 했고, 이불이 없어 멧방석을 덮고 잠을 잤다고 했다.
그는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다. 중학교에 가야 할 무렵, 형편이 안 되니 1 년만 기다리라는 부모님 말씀에 그냥 눌러앉았다. 하지만 애시당초 1년 지난다고 나아질 형편이 아니었다. 2년쯤 집안 일을 돕다 누나 손잡고 서 울로 튀었다. 그때 그의 나이 열다섯이었다. 이후 펼쳐진 삶은 촌뜨기 소 년의 서울표류기일 뿐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삼스럽게 말하기도 쑥스럽고, 설사 말한다고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뻔한 얘기”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남대문시장과 청계천 평화시장 주변의 봉제공장을 전 전했다. 전봇대에 “밥 먹여주고 기술도 배워준다”고만 써붙이면 사람들 이 떼로 모여들던 시절이었다. 처음엔 쪽가위로 실밥 따고 단추 치는 게 일이었다. 월급은 언감생심. 사장이 생각날 때마다 툭툭 던져주는 용돈이 월급이나 마찬가지였다. 월급을 주면 써버리니 연말에 몰아 주겠다는 사 장의 말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일하다 공장이 망하면 몇년치 월급도 날아갔다. 코딱지만한 공간을 쪼개 다락까지 낸 공장에서 그는 새 벽부터 밤 늦게까지 몸을 팔았다. 청년 전태일이 그랬던 것처럼.
전태일이 평화시장 한복판에서 불꽃으로 타오를 때, 그는 근처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고 있었다. 물건을 어서 내라는 공장장의 독촉에 쫓겨 온신경 이 미싱바늘을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갑자기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파도 처럼 밀려왔다. 청년 하나가 분신했다는 거였다. 창문을 내다보니 사람들 이 어디론가 내달리고 있었다. 청년이 누구이고, 왜 몸에 불을 붙였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도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일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 “그때 어쩌면 전태일을 태운 불씨 하나가 날아와 눈앞에서 반짝했는지 모른다.”
전태일이 죽은 뒤, 그는 재야단체에서 여는 노동교실에 드나들기 시작했 다. 친구들과 ‘이본침’(바늘이 두개인 봉제기계)이라는 모임을 꾸리고 회보를 내기도 했다. 근로기준법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마음에 새겼다. “일밖에 몰랐던 촌뜨기가 노동운동가 흉내를 내게 된 것이다.” 그런 각 성은 급기야는 근로조건 개선을 촉구하는 단식투쟁으로 이어졌다. 그때 함께 싸우던 전태일의 어머니가 경찰에 머리채를 붙잡혀 짐짝처럼 계단을 굴러가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잠뱅이 성공은 순전히 아버지 덕”
사람이란 게 참 간사하단다. 봉제판에서 굴러먹은 지 10년 만에 그는 공 장장으로 승진했다. 이제 노동자에서 사용자 비슷하게 위치가 바뀐 것이 다. 그러고 나니 공장 애들이 노조니 모임이니 하는 데 나가는 게 영 마 음에 들지 않더란다. 한때는 양 몰듯 사람들을 데리고 나갔던 그였지만, 이제는 재단사가 애들을 데리고 나갈라치면 문을 막아섰다. 스스로도 참 어처구니없는 변신이었다. 그때 속으로 반성하듯 변명했다. “사람은 그 때그때 상황에 맞게 사는 것일 뿐이라고.”
1년 뒤 그는 아예 봉제공장을 차렸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여섯. 곧바로 남대문 새벽시장에 진출했다. 통금이 있던 때라 새벽 4시에 일을 시작했 다. 전국에서 올라온 보따리장사들에게 ‘키커’라는 상표의 청바지를 넘 겼다. 생체시계가 완전히 거꾸로 돌아가는 나날이었다. 부부생활이고 자 녀교육이고 다 뒷전으로 밀려났다. 대신 금고에는 그만큼 돈이 쌓여갔다. 그는 이따금 직원들에게 삶이 심심해지면 새벽시장에 나가보라고 권한다. “그러면 내가 얼마나 게으른지, 내가 얼마나 잠꾸러기인지 알게 될 테니 까.”
잠뱅이를 시작할 무렵 그는 이미 부자였다. 눈비 맞으며 15년 동안 새벽 시장을 지킨 결과였다. 잠뱅이라는 상표로 청바지 장사를 하겠다니 사람 들이 쫓아다니며 말렸다. 청바지에 그런 한글 상표는 어울리지 않으니 사 서 고생하지 말라는 거였다. 구청공무원인 친구는 특히 단호했다. “6·2 5전쟁 뒤 미국에 주 하나가 늘었다. 바로 우리나라다. 우리는 미국의 3대 무기인 햄버거와 콜라와 청바지에 완전히 점령당했다. 그런데 그런 청바 지에 한글 상표를 달겠다고. 아서라.”
정말 그랬다. 매장을 찾은 손님들은 청바지는 마음에 들어 하면서도 상표 는 싫어했다. 상표가 촌스럽고, 유치하고, 심지어 창피하다고까지 했다. 어떤 젊은이는 아예 상표를 떼고 달라고도 했다. 할 수 없이 면도칼로 상 표를 떼다가 바지를 찢는 바람에 새 바지를 내준 적도 많았다. 그래도 그 는 한국 브랜드 청바지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고집을 부렸다. 상표 때문에 10벌 팔릴 게, 5벌만 팔려도 좋다고 다짐했다. “남들이 독 립운동하냐고 비아냥대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잠뱅이라는 상표에는 어렸을 적 재미난 기억이 숨어 있다. 어느 땡볕날, 아버지가 들어오자마자 등거리와 잠뱅이를 내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우물 로 등물을 해야겠다는 거였다. 한데 그는 고개만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 등거리는 알겠는데, 잠뱅이가 뭐지. 아버지의 호통이 날아들었다. “이 놈 뭘 꾸물대는 거냐.” 그는 그래도 꿈쩍하지 않았다. 황소처럼 눈만 멀 뚱거리다가 끝내 주먹만한 군밤을 맞고 말았다. “잠뱅이의 성공은 순전 히 아버지 덕이라니까.”
외제차·골프회원권도 사봤지만…
그는 불량품이나 재고품을 매달 원주로 보낸다. 88년 한 신부를 알게 된 뒤부터다. 탄광촌의 아이들을 위해 쓰겠다고 해 넘겼는데, 막상 신부한테 돈 달라고 손을 벌릴 수가 없더란다. 그게 한동안 속상하기 짝이 없었다. 덤핑으로 넘기면 한달에 얼마고, 1년이면 얼만데. 새벽같이 돈 벌어 남 좋은 일만 하는 바보. 그날로 이태원에 가서 외제승용차 사고 골프회원권 도 샀다. 한데 그게 영 취향에 맞지 않았단다. 결국 승용차도 아이들에게 공짜로 넘어갔다. 골프회원권은 얼마 뒤 장사밑천이 모자라 반값에 팔았 다.
그는 장사가 이윤을 쫓는 행위란 걸 모를 만큼 바보가 아니다. 그렇다고 손해보고 물건 판다고 푸념할 만큼 거짓말쟁이도 아니다. 고생해 돈 벌었 으니 사회에 재산을 환원하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갖고 있는 독지가는 더 더욱 아니다. 장삿속 못지 않게 고집도 부릴 줄 알아야 제대로 된 장사꾼 이라고 여길 뿐이다. “그러다 성공하면 좋은 거고, 손해보면 할 수 없는 일이고.”
사진 정진환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