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1997년07월17일 제 166호 한겨레21

대북지원 창구가 막혔다

(사진/식량지원 협정을 위해 북으로 향하는 적십자사 직원들. 민간단체들은 식량접수 거부가 2차접촉 때 제시할 분량을 늘리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대한적십자사가 북한식량지원 민간단체들이 모금한 ‘식량’의 접수를 거 부하고 있어 관련 단체들의 비난여론이 드세지고 있다. 불교추진위원회, 겨레사랑-북녘동포돕기운동 등 식량지원 민간단체들에 따르면, 지난 6월 중순 이후 이들이 대한적십자사에 요청한 지원식량 접수요청이 모두 거절 됐다. 지난 5월26일 베이징 남북적십자회담 때 합의된 5만t 지원분이 이 미 찼다는 게 그 이유다. 이에 따라 대북지원 민간단체들은 ‘대북지원의 또다른 경로’를 모색하는 등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


7월달에는 5만t만 도와라

‘한주 한끼굶기 운동’을 추진중인 불교추진위원회는 지난 6월 말 옥수 수 2천t을 보내기 위해 적십자사를 찾았다. 가급적 빨리 이 물품을 북한 에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적십자사쪽으로부터 “이미 합의 물량이 다 찼으며, 따라서 7월중 ‘북송’은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들었을 뿐이 다. 적십자사 직원은 이어 ‘제1차분(5만t) 대북 구호물자 전달계획 조정 안’이라는 문서를 보여줬다. 이 문서에는 7월15일까지 총 5만t을 지원하 는 것으로 돼 있었다. 적십자사쪽은 대신 8월 이후 다시 보내는 물량이 생기면 불교추진위의 원조식량을 우선 고려하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그러 나 적십자사쪽은 “그것도 북한적십자사와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전제 아래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추가식량지원이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불교추진위뿐만이 아니다. 민주노총·민족회의 등 재야단체 중심의 겨레 사랑-북녘동포돕기 범국민운동도 현재 총 모금액 24억원 중 16억원 정도( 옥수수 1만2천t분)밖에 집행하지 못하고 있다. 겨레사랑쪽의 추가지원분 옥수수 5천t 역시 적십자사의 ‘대북식량지원 쿼터 5만t’에 걸려 북한행 이 보류된 상태다. 또 지난 6월13일 ‘옥수수 3만t 보내기’ 기자회견을 가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도 이 계획을 계속 미룰 수밖에 없는 처지다. ‘옥수수10만t 보내기 범국민운동’의 1만1천t과 천주교 1천t, 우리민족 서로돕기 불교운동본부 1천t, 원불교 1천t 등 여러 단체의 성의가 모아진 이 물량이 아직 북한동포들에게 전달되지 못하는 이유도 똑같다. 역시 5 만t 쿼터다. 지난 5월말 언론으로부터 “대북 식량지원의 획기적 조처” 라는 화려한 조명을 받았던 남북적십자회담이 오히려 북한에 대한 적절한 식량지원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는 셈이다. 당시 남북적십자사는 “한적이 오는 7월 말까지 옥수수 기준 5만t을 1차로 지원하고, 추가지원 문제는 추후 논의한다”는 등 16개 항에 합의한 바 있다.

이런 적십자사의 태도에 대해 민간지원단체들은 “굶어 죽어가는 북한동 포의 상황을 고려할 때 대북 식량지원은 가급적 많은 분량을 가급적 빨리 보내야 하는 게 원칙”이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베 이징회담의 합의분 5만t을 최소기준으로 이해해야지 그것을 근거로 식량 지원을 거부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통일원의 한 관계자도 적십자사의 태도가 ‘경직된 것’이라는 데 동의한 다. 이 관계자는 “베이징회담 때 합의한 5만t은 사정에 따라 조금 덜 갈 수도 있고 더 갈 수도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해석했다. 이 관계 자는 그러나 민간단체들의 통일원·적십자사의 행정에 대한 비판은 상당 부분이 ‘민간단체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적십 자사를 통한 대북지원은 총량을 제외하고 우리말 상표 부착, 지정기탁 등 이 가능할 뿐 아니라 세계식량계획(WFP) 등 국제단체가 보내는 것보다 빠 르다는 것이다.

‘단일창구’인 적십자사쪽도 대북식량지원 접수거부 문제가 “잘못 알려 져 있다”는 자세다. 우선 적십자사쪽은 “정부가 정해놓은 창구단일화제 도 속에서 적십자사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항변한다. 만일 정부가 단 일창구를 푼다면 각 단체가 제각각 북한을 돕게 되고 결과적으로 혼란만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대북정책의 혼선’ 등 정 부가 실익을 따져 결정할 사항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는 어쨌든 현재의 창구단일화 속에서 모든 물량이 적십자사로 몰려 적십자사가 겪는 어려움 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적십자사 수송난으로 예정 물량도 못보낼 판

적십자사가 밝히는 가장 큰 어려움은 ‘교통난’이다. 현재 대북식량지원 은 주로 단동-신의주, 집안-만포, 도문-남양의 세군데 육로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중국과 북한의 철도 사정이 어려워 7월15일까지 예정된 물 량도 제때 수송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적십자사쪽은 또 중국의 경우 대규모 물량을 옮기기 위해서는 화차를 최소 15일 이전에 섭외해 놓아야 하는 등 어려움이 크다고 설명한다. 이런 상황에서 민간단체의 물량만 받 아놓을 수는 없다는 것이 적십자사의 입장이다.

민간단체들은 그러나 이런 적십자사의 항변이 변명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우리민족서로돕기의 한 관계자는 “화차가 없어서 못보낸다는 것은 거짓 말”이라고 주장한다. “수송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화차를 구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겨레사랑-북녘동포돕기 의 한 관계자는 “화차 확보가 어렵다면 원활한 지원을 위해 오히려 지금 부터 화차를 확보해 식량을 보내려고 노력해야 할 것 아니냐”고 반문한 다. 8월에도 화차 확보가 낙관적이지 않다면 그렇게라도 해야 북한 지원 물품이 신속하게 전달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들은 적십자사의 태도가 한마디로 ‘의지 부족’을 드러낸 것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북한지원 민간단체들은 또 지난번 합의에 포함된 인천-남포항으로의 수송 은 언제든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1주일에 한번 대북 무역품을 남포로 수송하는 한성코리아의 한 관계자는 “현재 컨테이너 2백개 정도 를 선적할 수 있는 배가 운항하는 데 물품이 없어 많아야 50개 정도만 싣 고 간다”면서 “이것도 대부분 임가공 원료고 식량은 7월 들어 하나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적십자사 관계자는 이에 대해 “바닷길 수송은 국 내에서 출발하는데 민간단체들이 비싼 국산 밀가루보다는 싼 중국산 옥수 수를 선호해 이를 이용하기 어렵다”면서 “이는 민간단체들의 문제”라 고 주장했다. 하지만 적십자사는 지난 7월 초 “국산 밀가루를 바닷길로 보내겠다”는 불교추진위원회의 제안도 ‘남북합의사항’를 들어 거절했 다.

민간단체들은 그래서 이번 ‘접수거부’ 사태가 통일원과 적십자사의 ‘ 또다른 속셈’에 따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기독교계인 남북나눔운동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정치적 목적의 여러 협상을 위해 식량지원을 미루 고 있는 것”으로 이번 사태를 해석했다. 앞으로 있을 남북적십자 2차회 담 등에서 지원물량을 불리기 위해 민간단체의 지원을 막고 있다는 것이 다. 이와 관련해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한 관계자는 “적십자사는 민간 단체가 모은 돈을 단순히 전달하는 창구”라면서 “민간단체들이 굶주리 는 북한동포를 위해 애써 모은 것을 가지고 적십자사가 과도하게 생색을 내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민간단체들은 또 이번 사태에 ‘4자회담’ 등 앞으로 있을 대북협상 카드 가 약해지지 않게 하려는 통일원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의심한다. 겨레사랑-북녘동포돕기운동의 한 관계자는 “이번 사태는 통일원의 지침 탓일 것”이라며 그 이유로 “식량지원 일을 하면서 적십자사가 통일원의 단순 집행기관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적 십자사는 이런 결정을 독자적으로 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통일원 관계자는 강하게 부정했다.


대북식량 지원 거부 배후는 정부?

문제는 이런 상태에서 대북식량지원 민간단체들의 활동영역이 넓지 않다 는 점이다. 대북식량지원이 ‘창구단일화’라는 조처에 묶여 있을 뿐 아 니라 검찰이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과 전국연합을 조사하는 등 최근 안팎 으로 압력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공금유용 혐의로 조사를 받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은 “적십자사가 대북식량지원 접수를 거부하고 있 는 상황인데도 검찰은 모금한 돈을 왜 안 보내느냐고 심문하더라”며 이 런 일련의 사태가 ‘대북지원에 찬물을 끼얹기 위한 정부의 조처’라고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부 단체들은 “지원이 봉쇄되면 그대로 있지는 않겠다 ”는 단호한 태도다. 이미 일부 단체는 이미 국제기구 등 다른 경로를 알 아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일원과 적십자사가 계속 수송편의 어려움을 들어 지원을 거부하면 우 리가 스스로 화차를 섭외해 단동이나 도문까지 물건을 나를 생각입니다. ”

겨레사랑-북녘동포돕기운동의 한 관계자 말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에 대한 지원을 늦출 수는 없다는 것이다.

김보근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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