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1997년05월29일 제 159호 한겨레21

나토- 러시아 손잡는다

유럽의 안보지형에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졌다. 지난 5월14일 북대서양조 약기구(나토)와 러시아가 가상적국으로서 오랜 불화를 털어내고 나토의 동유럽 확대와 ‘공존’의 새로운 협력관계에 합의함으로써 탈냉전 이후 새로운 유럽안보체제 구축을 위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최대의 외교적 승리는 미국

이는 냉전기 서유럽권과 옛 소련권의 세력균형으로 유지되던 유럽안보지 형이 탈냉전의 과도기를 거쳐 확대된 서유럽권과 러시아권으로 재편했음 을 의미한다. 이는 또 확대된 나토가 냉전기 유물인 ‘집단방위체제’라 는 단순한 군사동맹의 틀을 벗고 ‘집단안전보장기구’로의 본격적인 변 신 시점을 맞게 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토는 이번 ‘확 대’를 통해 지난 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영역이 겹치는 유럽안보협 력기구(OSCE), 유럽연합의 군사기구인 서유럽동맹(WEU)과 경합하던 상황 에서 새로운 유럽안보체제의 중심기구로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됐다.

나토와 러시아가 대등한 협력을 지속키로 약속한 ‘나토-러시아간 상호관 계 및 협력 안보에 관한 기본의정서(가칭)’는 △러시아가 나토의 동유럽 확대를 용인하는 대신 △나토가 옛 소련블록의 동유럽 가맹국에 대한 핵 및 재래식 전력을 배치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나토와 러시아가 유럽 안보문제에 대한 나토-러시아 평의회를 구성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 상설협의체에 대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러시아는 나토의 독자적인 방위 문제를 제외한 지역 내 평화유지활동, 무기통제, 테러리즘, 마약밀수 등 의 문제에 대해 발언권을 갖게 됐다.

러시아가 “유럽에 새로운 경계를 긋는 책동” “냉전의 대를 이어 차가 운 평화를 획책하려는 기도”라고 비난하던 강경 태도를 뒤로 하고 나토 확대를 용인한 배경에는 △러시아의 반대에도 나토 확대가 강행될 수밖에 없고 △국내적으로 경제개혁에 주력하기 위해 서방의 지원을 구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인식이 깔려 있다. 또 소련군이 철수한 이후 세력의 진공상태 에 놓여 있던 중동부유럽국가들이 유럽연합과의 경제통합과 함께 안전보 장에서도 서유럽과의 통합을 희망하고 있어, 그 욕구를 마냥 저지할 수 없다는 러시아의 현실적인 힘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나토 확대 합의에서 최대의 외교적 승리자는 역시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 다. 탈냉전 이후 미국우위의 세계질서를 유럽에 적용하는 교두보로서 나 토의 구실과 생존에 대해 러시아의 보장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유럽안전 보장의 또다른 축인 유럽안보협력기구나 서유럽동맹은 현실적인 무력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지난 93년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요구를 수용하 는 형태로 러시아의 반대가 확실한 상황에서 내부적 조율도 거치지 않은 채 서둘러 ‘나토 확대라는 `도박’을 시도했다는 비난을 받아온 것도 사 실이다. 러시아가 언젠가 다시 한번 중동부유럽에 위협이 될 수 있으며 러시아가 약화된 현재가 서유럽의 보호막을 잠재적 위협목표까지 확대하 는 절호의 기회라는 게 추진의 동기였다. 나토 확대의 1차 후보대상국이 냉전 이전 서유럽의 일부였던 체코, 헝가리, 폴란드 등 가톨릭 국가들이 란 점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이 점에서 나토 1차확대는 사실상 서유럽의 확대로 볼 수 있다.


나토, 동유럽에 군사배치 불필요 천명

그렇더라도 이번 협상에서 러시아도 약화된 협상입지에 비해 상당한 성과 를 거둔 것으로 기록될 만하다. 러시아는 비록 요구조건을 모두 달성하지 못했지만 안보의 불안을 털어낼 수 있는 틀을 찾아냈다. 나토 의사결정과 정에 대한 거부권은 아니지만 비회원국으로선 유례없는 발언권 확보를 통 해 어느 정도 체면을 세운 셈이다.

하지만 이번 합의는 상설협의체 구성이라는 가시적 성과에도 정치적 선언 이라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합의 발표 수시간 만에 옐 친 대통령은 이번 합의가 나토의 군사적 확대가 있을 수 없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이라고 국민들을 설득했다. 이에 대해 나토쪽은 현재로서 핵전 력과 실질적인 군사력 배치가 불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혀 해석상의 문제를 노정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확대된 나토는 단순한 군사동맹으로서 옛 시절과 단절의 시점을 맞게 된다. 나토가 21세기 세계질서 특히 유럽질서의 강력한 보장자가 될 수 있을지, 아니면 신뢰할 수 없는 열강들의 말잔치장으로 전락할지는 이 런 과제들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류재훈 기자/ 한겨레 국제부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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