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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
1997년05월29일 제 1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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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영삼 대통령과 맞섰던 92년 대선. 33.8%의 지지를 얻는 데 그쳐 세번째 분루를 삼켜야 했다. )
‘불굴의 민주투사’라는 찬사와 ‘권력의 화신’이라는 극단적인 비난을 한몸에 받아온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 그가 지난 5월19일 전당대회에서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됨으로써 43년 정치 이력서에 통산 네 번째 대권도전이라는 진기록을 적게 됐다.
김 총재는 그동안 10개 야당을 거치면서 6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3회 낙선했다. 그러나 세차례에 걸친 대권도전에서만은 모두 실패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
첫번째 도전은 지난 71년 4월27일에 치러진 제7대 대통령 선거. 70년 제1 야당인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전에서 김영삼씨와 경쟁해 신민당의 후보 로 결정된 뒤 공화당 후보인 박정희 대통령과 맞붙은 것이다. 유세과정에 서 그는 박 대통령을 압도하는 인기를 누리며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결과는 패배였다. 45%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선전했지만 박 대통령보다 95 만표가 적었던 것이다.
두번째 대권 도전 기회는 유신통치와 신군부의 폭압이라는 17년 동안의 긴 터널을 지나서야 찾아왔다. 87년 6월, 전 국민적 항쟁의 성과로 대통 령 직선제가 쟁취되면서 같은해 12월16일 치러진 13대 대선이다. 그는 당 시 국민적 요구인 ‘양김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김영삼 후보와 함께하 던 통일민주당을 떠나 급조된 평민당 간판으로 대권도전을 감행했다. 그 러나 노태우(민정당) 김영삼(통일민주당) 김종필(신민주공화당) 후보가 각축을 벌인 이 선거에서 그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한다. 36.6%를 얻은 민 정당의 노태우 후보에게 대권을 내준 것은 물론이고 영원한 경쟁자인 김 영삼(28%) 후보보다도 적은 27.1%를 얻어 3위에 그치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패배를 ‘공작정치’와 ‘지역감정’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 92년 12월19일 생애 세번째 대권 도전에 나섰다.
민주당 후보로 나선 그는 90년 1월 ‘3당 합당’을 통해 민주투사에서 여 당인 민자당의 대권 주자로 변신한 김영삼 후보, ‘경제발전의 신화’를 내세운 국민당 정주영 후보와 맞서야 했다. 그는 “3당 합당을 통한 변절 자도 재벌도 아닌 영원한 민주투사 김대중을 밀어줄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김영삼 후보가 42%의 득표율을 기록한 데 비해 그는 33.8%를 얻는 데 그친 것이다. 이번만은 패배를 겸허히 인정했다. 그리고 12월19일 아침 “저에 대한 모든 평가를 역사에 맡기고 조용한 시 민생활로 돌아가겠습니다”라는 성명과 함께 정계를 은퇴했다.
대권의 꿈을 버리지 못한 것일까. 그는 95년 6·27 지방선거에서 조순서 울시장 후보의 유세를 돕는 것을 계기로 정치일선에 다시 등장해 7월18일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혼란스런 국정을 그대로 볼 수 없어서…”라고 그 이유를 해명했다.
그리고 9월5일 이기택 총재의 민주당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새정치국민회 의를 창당하면서 ‘대권에 대한 집념’을 다시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로 부터 1년9개월. 그는 또다시 대권도전의 전면에 나서게 됐다.
신승근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