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1997년05월29일 제 159호 한겨레21

기업 정보력 안기부가 안부럽다

(사진/전.노 비자금 사건 때 검찰청사에 모인 재벌그룹들의 직원들. "총수 소환은 없을 것"이라는 잘못된 정보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여의도 증권가는 오늘도 정보사냥꾼들로 붐빈다. 언제나처럼 “탤런트 아 무개씨가 최근 이혼하기로 합의했다”는 소문에서부터 “00그룹 XX씨가 어느 대선주자캠프에 합류할 계획”이라는 소문에 이르기까지 온갖 그럴 듯한 정보가 떠돌아다닌다. 정치인의 참모진을 비롯해 나름대로 정보에 밝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이곳을 무대로 팀을 이뤄 정기적인 모임을 갖 고 정보를 주고받는다. 수집한 정보를 분석해 사설정보제공업자들이 엮은 `‘정보지’가 나도는 곳도 이곳이다.

그러나 가장 많은 정보가 거래되는 곳이 증권시장이라고는 해도, 증권시 장 주변의 정보맨들은 정보싸움에서는 역시 마이너리그다. 정보의 질에서 메이저리그격인 재벌그룹 정보팀을 결코 따라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들 그룹 정보팀 멤버들은 굳이 증권가의 정보시장을 기웃거리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때로 안기부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막강한 정보력을 자랑한다.

권력의 이동기인 요즘 이들의 발길은 부쩍 바빠졌다. 대세 판단은 정치권 이상으로 그룹 총수들에게 최고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때로 그룹의 사 활까지 좌우하는 문제가 되기도 한다.


정보팀 관계자 청와대 소식도 술술

김현철씨의 비리 사실이 잇따라 언론에 불거져나오던 지난 3월 김영삼 대 통령이 “현철이를 진작 외국으로 내보냈어야 하는 건데…”라며 후회했 다는 청와대 고위인사의 말에 대해, A그룹 정보팀 관계자는 이렇게 덧붙 였다.

“김 대통령이 정권출범 뒤 미국을 방문했을 때, 대통령의 사위가 `‘현 철씨를 둘러싸고 말이 많으니 유학형식으로 외국에 내보내는 게 어떻겠느 냐’고 건의했다. 대통령은 이를 옳다고 받아들여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이 정보는 곧 현철씨의 귀에 들어갔다. 현철씨는 대통령 이 귀국하자 ‘`아버지를 진심으로 도울 사람은 나밖에 없다’며 선수를 치고 나섰다. 현철씨는 이날 밤 술에 취해, 미리 약속했던 아무개 인사와 의 저녁식사 자리에도 나가지 않았다. 이 일로 마음이 약해진 대통령은 더이상 현철씨에게 유학을 강요하지 않았다….”

마치 현철씨에게 직접 들었기라도 하듯이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그의 이 야기는 재벌 정보팀의 정보력 수준을 어느 정도 짐작케 한다. A그룹 정보 팀은 지난해 현철씨가 애틀랜타 올림픽경기장에서 의 테드 터너 회 장을 만났을 때, 터너 회장이 현철씨를 김정일로 착각하고 “아버지(김일 성)가 돌아가셨다는데 조문을 못가 미안하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국내최고의 정보력을 자랑하는 삼성그룹은 극도의 보안 속에 전격 발표된 금융실명제를 비롯해 김일성 주석 사망, 황장엽 비서 망명 소식 등을 공식발표에 앞서 포착했던 것으 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런 막강한 정보력에 비하면 재벌기업들이 스스로 밝히는 정보팀 의 규모는 초라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그룹에 2~ 3명, 삼성생명 등 일부 계열사에 별도로 소규모 정보팀을 운영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현대그룹은 “지난해 말까지 부장급 3명으로 정보팀 을 운영했지만 지금은 팀을 해체했다”며 “다만 임원들이나 홍보실 직원 들이 필요에 따라 정보보고를 올리고 있다”고 밝혔다. 엘지그룹, 대우그 룹 등도 “그룹정보팀에만 5명 안팎이 정보맨으로 뛰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재벌들은 정보맨들의 소속을 홍보팀 안에 두는 등 정보팀 의 운영에 대한 정확한 내용 공개를 극도로 꺼리고 있어서 이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특히 삼성그룹의 경우에는 그룹에만 10여명, 계열사를 포함하면 최소한 50여명은 넘는다는 게 재계의 정설로 돼 있다.


마당발 직원 가운데 정보맨 차출

정보맨이라면 “검은 색안경을 낀 기관원” 같은 이미지를 주기는 하지만 , 정보맨들이 당초부터 정보전문가들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안기 부 출신을 임원으로 고용한 그룹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교성이 뛰어나고 폭넓은 인맥을 가진 직원을 정보맨으로 발탁한다. 또 이들은 한번 정보맨 으로 발탁됐다고 해서 계속 정보맨으로 남는 것도 아니다. 1~2년 정도 지 나면 대개는 자신의 전공으로 복귀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일반인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고 급정보들을 수집하는 것일까?

B그룹 정보팀의 한 과장은 “그룹 정보팀도 ‘찌라시’라고 불리는 증권 가의 정보지를 참고하기는 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러나 “증권가의 정 보는 확인도 어렵고, 가치도 별로 없어 거의 중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 정보맨들은 대신 중요한 정보원들과 인맥을 총동원해 일 대 일로 만나 정보를 수집한다. A그룹의 Y부장은 “정보도 어차피 모이는 곳이 있게 마 련”이라며 “그곳을 뚫는 것이 효율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안기 부, 경찰간부, 정관계 인사들이 주요 타깃이 된다는 얘기다. 전·노 비자 금 사건 와중에서 “총수 소환은 없을 것”이라는 정보팀의 잘못된 보고 로 한바탕 곤역을 치렀던 그룹들은 그뒤 사정당국에도 깊게 발을 뻗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재벌그룹 정보팀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 의 정보는 서로 교환한다. 4~5명씩 모임을 만들어 1주일에 한차례 정도 정기적으로 만나 정보를 맞바꾸는 것이다.

일단 정보맨들이 수집한 정보는 팀장을 거쳐 그룹총수 등 극소수에게만 보고된다. Y부장은 “정보맨의 능력에 따라 다르지만 보고할 만한 정보는 1주일에 2~3건 정도”라며 “그중 약 30% 가량이 나중에 사실로 확인된다 ”고 말했다.

어떤 정보가 더 가치있느냐에 대한 판단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S그룹 의 한 관계자는 “예전에는 정치권 관련 정보가 주를 이뤘지만, 요즘엔 8 0% 정도가 재계와 관계 정보”라고 말했다. 재계동향이나 정부정책이 권 력집단 내부의 역학관계 변화 따위보다 더 중요하게 평가되기 때문이다. 물론 시국이 불안정하거나 선거때가 되면 상황은 바뀐다. 정치정보의 가 치가 다시 올라가는 것이다. 일부 재벌그룹은 선거 때 주기적인 여론조사 를 실시하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재벌들의 정보전쟁이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정보전은 수집한 정보를 활용하는 단계에서 오히려 본격화한다. 그룹 정보팀들은 수집된 정보가 자기편에 유리한 정보라면 과감히 정보시 장에 흘려보낸다. 지난해 개인휴대통신(PCS)사업자 경쟁과정에서 증권시 장에 뿌려진 “김기섭 안기부 전 차장이 현철씨를 등에 업고 한솔을 밀고 있다”는 정보는 정부쪽이 한솔을 사업자로 선정하는 데 부담을 안겨주기 위해 한 그룹 정보팀이 의도적으로 풀어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 정보는 당시만 해도 소문에 불과했으나, 최근 검찰조사를 통해 김기섭 씨가 한솔그룹에 70억원을 맡겨 관리한 사실이 드러났다. 날조한 정보를 흘려보내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와 관련해 최근 구속된 김현철씨 수사과 정에서도 경쟁사를 음해하는 정보가 난무해 관계자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대아건설의 경우 현철씨에게 수억원을 줬다거나 현철씨 자금을 관리했다 거나 하는 날조된 소문이 검찰 관계자의 입을 빌린 형태로 나돌아 금융권 에서 대출금을 회수하는 등의 곤욕을 치렀다. 대아쪽은 충남지역의 경쟁 사인 ㄱ건설쪽에서 흘린 것으로 지목했지만 맞대응할 뾰족한 방법이 없어 벙어리 냉가슴만 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재벌 총수들의 사생활 에 대한 그럴듯한 음해성 정보도 자주 증권시장에 출현하는 종목이다.


수집 정보 정책결정에는 큰 도움 안된다

정보맨들은 그러나 이런 정보활동에 투자하는 비용을 감안하면 재벌기업 이 정보전에서 얻는 소득은 별로 없다고 고백한다. D그룹 정보팀의 한 관 계자는 “이런 정보는 기업이 투자 여부를 판단하는 등의 중요한 정책결 정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며 “단지 정부가 대부분의 정보를 독점하고, 정책 결정도 여전히 불투명하게 이뤄지는 상황에서 행여 닥칠 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해 방어적인 차원의 정보수집일 뿐”이라고 말했다 . 그럼에도 정보맨들은 한결같이 음성적인 정보에 대한 수요가 조만간 사 라질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한다. 혼자만이 정보를 알고 싶다는 욕망을 경 영자들이 떨쳐버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남구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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