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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1997년05월22일 제 1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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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션 전쟁터의 최전방엔 디자이너가 있다. 창조자 디자이너는 영광을 한 몸에 받기도 하지만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고독한 존재다.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했던 우리 디자이너들이 최근 파리, 뉴욕 컬렉션 등에 당당 하게 한 자리를 차지할 뿐 아니라 주목도도 점차 높아가고 있다. 오늘이 있기까지 그 선구자 구실을 한 디자이너들이 있었다. ‘첫’이라는 단어 가 담고 있는 신선한 연상 뒤에 감춰진 이들의 고독한 싸움을 누가 다 설 명할 수 있을까? 그들 자신과 후배들이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다. 국내 최정상급 디자이너들은 이렇게 살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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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이미지를 세계에 판다
진태옥- 최초로 해외매장 개설한 걸출한 여장부
예술과 상업이라는 패션의 양쪽을 모두 걸머쥔 걸출한 여장부다. 34년생 으로 올해 나이 예순셋이지만 그는 오히려 최근 더욱 정력적인 활동과 도 전을 계속하고 있다.
학창시절부터 모양내기를 좋아했던 이 소녀는 일본 패션잡지를 읽기 위해 일본어를 독학할 정도로 패션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때 일본잡지를 통 해 여성들을 코르셋에서 해방시킨 샤넬의 드라마틱한 패션인생은 그대로 진태옥의 인생이 된다. 디자이너로서의 첫걸음은 서른한살이던 65년 이화 여대 앞에 ‘프랑소와즈’라는 의상실을 열면서부터다. 인테리어 개념이 전무하던 시절, 그는 목수와 함께 직접 횟가루와 아교를 손에 묻혀가며 매장을 꾸몄다. 그뒤 10년 이상 여성 패션 의류만을 다루던 그는 78년 아 동복 ‘베베 프랑소와즈’, 86년 남성복 ‘프랑소와즈 옴므’ 등으로 영 역을 확장해 나간다.
86년 뉴욕에 프랑소와즈 매장을 설립하며 처음으로 해외에 진출한다. 하 지만 몇해 뒤 철수하고 만다. 한국제품이라면 우선 가격부터 깎고 보는 바이어들의 공세에 아예 판을 엎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옷에 대한 그의 예술가적 자존심은 남다르다. 그래서 그의 옷은 비싸다. 특히 해외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는 또 제품검사에 통과돼 전시장에 걸려 있는 옷이라도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발견되면 도예가가 갓 구운 도기를 깨뜨 려버리듯 그대로 걷어가 버린다. 완벽주의자다.
92년 그는 세계시장 재진출을 꾀하며 (주)진태옥을 설립하고, 93년 파리 컬렉션 참가를 계기로 파리에 지사를 설립한다. 이 파리지사의 지사장이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씨다. 파리지사를 통해 (주)진태옥의 작품은 현재 12개국 32개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진태옥 작품의 특징은 88년 서울올림픽 유니폼과 색동옷으로 유명한 아시 아나 항공 유니폼에서도 알 수 있듯 한국의 이미지를 상품화한 데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매번 서양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지고 있다. 진태 옥의 진정한 성과는 컬렉션을 통해 얻은 평가가 구체적 마케팅으로 이어 진다는 점이다. 매년 파리 프레타 포르테에 참가할 때마다 주문량이 매년 2~3배씩 늘어나고 있다.
그는 또 90년 서울패션디자이너협의회(SFA)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 하는 등 국내 패션산업 발전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국내 최초의 정기 패션쇼인 SFA 컬렉션을 탄생시킨 것도 그의 공로다.
이와 함께 진태옥 디자인실은 디자이너 사관학교처럼 인식되고 있다. 진 태옥은 사장과 직원이 아닌 스승과 제자의 입장에서 이들을 엄격하게 가 르친다. 그 결과는 (주)진태옥 출신 디자이너들의 눈부신 성공으로 나타 나고 있다.
그의 디자인에 대한 열정은 치과대학에 다니던 딸을 설득해 디자이너 후 계자로 변신시킨 데서도 잘 나타난다. 딸 노승은(38)씨는 89년부터 (주) 진태옥의 이사 겸 디자이너 실장으로 일하다 최근 ‘노승은 컬렉션’이라 는 자체 브랜드로 독립했다.
새로움이 빛나는 독특한 멋
이신우- 패션디자인을 최초로 미국에 수출한 디자이너
‘이신우’는 새로움이다. 이신우 라인이 지닌 강한 캐릭터는 늘 시대를 앞서나갔고 그의 약력 앞에는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유달리 많다. 이 신우는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들 중 오리지널리티가 가장 명확한 사람 으로 꼽힌다.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이 여성스러운 멋을 추구할 때 그는 다 소 변칙적인 라인을 선보임으로써 캐릭터라인의 새 장을 연 디자이너로 평가받는다. 뿐만 아니라 그는 특유의 마케팅 감각으로 사업적인 면에서 도 성공을 거둬 토털패션 브랜드 (주)이신우는 지난해 4백억원이 넘는 매 출을 올리기도 했다.
유복하게 어린시절을 보낸 그는 경기여중·고를 졸업하고 60년 이화여대 서양화과에 입학한다. 재학시절부터 남 다르게 보이고 싶어 자신의 옷을 직접 만들어 입기를 즐겼는데 이러한 ‘끼’가 발전해 오늘의 이신우를 있게 했다. 대학재학시절 국제복장학원에 나가 패션을 전문적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친구 소개로 만난 당시 서울대생인 지금의 남편(박주천 의원)을 만나 결혼한다. 그리고 서울 용두동 살림집 마루에서 ‘오리지날 리’라 는 맞춤복 살롱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디자이너로서의 첫 출발이다. 1968 년이었다. 제법 인기를 끈 그는 71년 명동으로 진출해 당시로선 거의 전 무했던 기성복코너도 마련한다. 그리고 77년 미국진출을 시도, 77~82년까 지 뉴욕의 의류회사 ‘The Silk Farm’에 자신의 패션 디자인을 세계 유 명 디자이너와 똑같은 디자인료를 받고 판다. 한국의 패션디자인을 미국 에 수출한 최초의 한국 디자이너다. 그리고 그해 파리 프레타 포르테에 참가한다. 83년 뉴욕에 (주)이신우를 현지법인체로 설립한 뒤부터는 해마 다 20~30%의 꾸준한 신장을 거듭, 이제는 기반이 어느 정도 잡힌 상태다. 그리고 90년 도쿄컬렉션, 93년 파리컬렉션에 한국 디자이너로서는 처음으 로 참가한다.
얼핏 보면 마냥 승승장구해온 인생같지만 그도 많은 눈물과 좌절을 겪었 다. 그의 가장 아픈 기억은 그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 첫발을 들여 놓았 던 일본의 디자이너가 불과 몇년 만에 세계적 명성을 얻는 것을 보고 느 낀 비애감과 자괴감이다. 그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는 말로 그날의 아픔을 곱씹는다.
(주)이신우는 ‘이신우’, ‘오리지날 리’, ‘일드 쏘시에’(이상 여성 복), ‘영우’(주니어 정장), ‘이신우 옴므’(남성복), ‘이신우 컬렉션 ’(잡화) 등 6개의 브랜드를 거느리고 있다. 또 그의 딸 박윤정(33)씨가 ‘오리지날 리’ 디자인 실장으로 어머니의 뒤를 잇고 있다.
전통에 생명을 입히다
이영희- 한복의 선과 색으로 세계에 우뚝서다
이영희는 늦은 나이에 우리 옷으로 세계무대에 나선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리고 지금은 한복뿐 아니라 양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로 진출했다 . 그의 옷은 ‘색’으로 통한다. 한복의 고운 빛깔이 그 바탕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구가 고향인 그는 여고생시절이던 50년대 당시 바이올린 레슨을 받을 정도로 부유한 집안의 외동딸로 자라났다. 그러나 고교졸업 뒤 첫 미팅에 서 만난 육군장교와 결혼하면서 꿈많던 소녀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집안에 묻혔다. 옷 만드는 게 취미였던 어머니로부터 한복을 만들고 손질하는 법 과 재래식 염색방법을 익혔던 그는 결혼 10년이 지나면서 수유리에서 솜 장사를 시작한다. 이후 옷감, 이불로 업종을 넓혀갔고 이불을 만들면서 남아도는 옷감으로 치마저고리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그의 모든 생각은 ‘색’으로 쏠렸다. 한 가지 색을 내기 위해 수십번의 염색실험을 거듭했 고 자신만의 독특한 색을 만들기 위해 전국 어디든 찾아다녔다. 그는 이 때를 인생의 황금기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한복짓기 4년 만에 그동안 모아뒀던 돈을 친척에게 사기를 당해 몽땅 날렸다. 벼랑 끝이었다. 그러 나 위기는 기회.
친지의 도움으로 77년 ‘이영희 한국의상’이라는 한복집을 서교동에서 시작한다. 그의 나이 40이었을 때다. 뭔가 다른 한복을 만들기 위해 매일 색과 디자인을 연구했고 정식 스케치를 배운 일도 없었지만 한복을 그리 고, 서점에서 한복에 관한 책을 사 모으고 단국대 석주선 박사, 이화여대 유희정 박사 등 의상학 교수들을 찾아다니며 한복을 배웠다. 성신여대 대 학원에 입학, 2년간 염직공예 과정을 이수하기도 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인사동이나 박물관을 찾아 우리 한복을 보고 또 보았다.
이런 노력 덕분이었는지 그의 한복은 날로 명성을 더해갔다. 80년 첫 ‘1 5인 의상발표회’를 가진 뒤, 그는 자기 말처럼 패션쇼 중독자가 돼버렸 다. 8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60여회의 패션쇼를 가졌다. 그는 83년 워싱 턴 패션쇼를 시작으로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많은 패션쇼를 가진다. 84년 LA올림픽 개막식 기념패션쇼, 85년 일본 쓰쿠바 박람회 기념의상전, 그리 고 86년 한·불 수교 1백주년 기념의상전(파리) 이후 베이징, 모스크바, 오사카 등 세계 어디든 그는 갔다.
그는 또하나의 도전을 꿈꾸며 87년 개량복으로 방향을 바꾼다. 개량복을 만들어야 세계무대에 진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리, 밀라노 , 도쿄 등 유명 컬렉션을 무대 아래서 구경하던 그는 93년 파리 추동컬렉 션에 자신의 작품을 처음으로 올린다. 개량복이 아닌 완전한 양장으로. 그러나 그 속에는 한복의 색과 선과 정신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파란눈 의 외국인들에게서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이러한 찬사를 바탕으로 그는 9 4년 10월 파리에 부티크를 오픈했고 지금까지 매년 파리 프레타 포르테에 참가하고 있다. 그는 현재 한복매장인 ‘이영희 한국의상’ 외에 여성복 ‘이영희’, 홈패션 ‘메종 드 이영희’ 등 3개 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약사였던 딸은 결혼 뒤 그와 함께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권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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