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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05월22일 제 158호 한겨레21

대륙 보듬은‘북한 봉선화’

(사진/북한의 전설무용극 <봉선화>는 비극적 죽음을 맞은 한 여인의 무덤에 핀 봉선화를 둘러싼 이야기다.)

“잊지 말자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 잊지 말자 봉선화의 비참한 운명을 ….”

혁명가극 <피바다>로 널리 알려진 북한의 피바다가극단이 5년 만에 처음 으로 중국 순회공연에 나섰다. 피바다가극단이 이번에 가지고온 무용극은 <봉선화>. 추악한 욕망과 부조리한 세상의 폭압 속에 비극적 죽음을 맞은 한 착한 여인의 무덤 위에 피어난 봉선화를 둘러싼 이야기다. 지난 4월28 일의 베이징에서 첫 공연을 편 피바다가극단은 5월 중순까지 칭다오 상하 이 창춘 등지에서 공연을 펼친다. 중국 문화부 등이 주최하는 ‘97 중국 국제 가극 무용극의 해’의 첫 행사로 무대에 오른 <봉선화>는 지난 95년 초연된 이래 북한에서만 지금까지 모두 80여 차례에 걸쳐 공연된 작품이 다.


정치적 배려로 고위 지도자 대거 관람

베이징에서 지난 4월28~30일 3일간 열린 <봉선화> 공연에는 중국사람보다 북경 거주 한국사람들을 더 많이 볼 수 있었다. 한-중 수교 이후 중국에 들어온 이들에게도 세계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피바다가극단 공연을 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베이징에서 공연된 무용극 <봉선화>는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북한 의 다른 무용극과는 달리 혁명 이념의 색채가 그리 강하지 않은 것이 특 징이다. 물론 <봉선화>도 봉건지주와 압박받는 힘없는 하인들의 갈등이 바탕에 깔려 있기는 하다. 하지만 작품 전체에 흐르는 긴장관계는 계급 갈등보다 선과 악의 대립적 성격이 더 강하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이 지 주에 대한 반란과 같은 극단적 방법보다 마음에 서린 한이 봉선화로 피어 오르는 식으로 좀더 완곡하게 해소된다. <봉선화>의 이런 ‘혁명성 약화 ’에 대해서는 현재 어려운 북한 상황과 관련된 해석이 많았다. 자체 모 순이 커진 북한 상황이 과격한 혁명적 요소의 등장을 막았다는 것이다. 이번 공연에는 또 한-중 수교 이래 불편했던 북-중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정치적 배려가 짙게 배어 있다. 이는 우선 <봉선화> 공연 첫날인 4월28일 중국 공산당 정치국원 리티에잉과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인 왕광잉 등 중국 고위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한 데서도 드러난다. 이날 리티에잉은 중국과 북한의 우의가 마오쩌둥이나 김일성과 같은 원로들이 중심이 되어 피로 맺은 것임을 강조했다. 그는 또 “현재와 같은 복잡한 국제 정세 아 래 두 나라간의 관계 강화가 양국 인민들의 이익에 부합된다”고 말했다. 중국이 극심한 식량 위기 등으로 궁지에 몰리고 있는 북한의 좌초를 방관 만 하지는 않을 것임을 내비치는 대목이다. 이에 따라 피바다가극단의 중 국 공연이 최근 중국이 북한에 대규모 식량원조를 약속한 데 대한 답방 차원이라는 해석도 큰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혁명성 떨어져도 예술적 감동 넘쳤다

어쨌든 가극을 관람한 많은 한국사람들은 북한가극이 보여주는 색다른 예 술적 감동의 세계에 고무된 표정이 역력하다. 우리의 전통적 소재를 웅대 하고 장엄한 규모의 서사극으로 소화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 다. 이는 <봉선화>에 선녀나 이 선녀가 지상에 두고 간 빗이 등장하는 등 우리 민족 전승 이야기 구조와 소재가 많이 녹아들어 있다는 데 기초한 것이다. 이들은 북한가극이 지닌 웅장함과 뛰어난 예술적 자질이 통일 이 후 우리 민족예술 발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을 토로한 다. 중국사회과학원에 방문학자로 와 있는 한 한국학자는 북한의 가극이 민족적 정서나 역사적 소재를 힘있게 서사극화할 수 있는 원초적 생명력 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한다.

남과 북의 사람들이 배우와 관객으로 만난 <봉선화> 베이징 공연은 통일 이후 남과 북의 예술적 저력이 창조적으로 승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메시 지를 남기고 있다.

베이징=김성환 통신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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