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야기
1997년05월22일 제 158호 한겨레21

“알프스 케이블카에서 만나요”

스위스 알프스산맥의 관광도시 루체른엔 해발 2,120m의 필라투스가 우뚝 솟아있다. 지금은 루체른을 찾는 방문객의 필수코스가 되다시피 했지만 1 8세기까지만 해도 ‘악마의 산’이라 부르며 접근을 꺼렸다. 그리스도를 처형한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직을 박탈당한 뒤 세상을 떠돌다 이 산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전설 때문이다. 이 험한 산 정상에 오르 려면 4인승 리프트를 타고 해발 1,415m의 중간지점에 내린 다음 다시 안 내원이 딸린 케이블카를 타야 한다. 정상에 서면 눈과 구름 등 온통 흰빛 뿐이어서 천상에 온 듯한 신비감이 온몸을 감싼다.

이 필라투스를 하루에 몇번씩 오르는 사람이 있다. 발터 쇼르노(64·왼쪽 )와 로버트 보글러(44). 케이블카 안내원이다. 루체른이 고향인 쇼르노의 경력은 벌써 37년째다. 처음에 아르바이트삼아 하던 일이 그의 천직이 됐 다. 그가 이 일을 하면서 지금껏 가장 놀랐을 때는 지난해 여름 꼭대기에 서 내려오던 케이블카가 고장으로 공중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서버렸을 때 다. 관광객들이 비명을 지르고, 아이들은 울고, 30여년을 알프스 케이블 카에서 보낸 그도 두려웠다. 쇼르노는 그때 먼저 자신이 30여년간 케이블 카를 운행하면서 단 한번도 사고가 난 적이 없었다는 점과 케이블카의 안 전시스템을 설명하며 어른들을 안심시키고, 그 다음엔 아이들에게 알프스 의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며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다. 케이블카는 20분 만 에 다시 움직였다. 관광객들은 십년감수했지만 케이블카를 내리면서 화를 내기보단 오히려 쇼르노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보글러는 그 사 건 직후 정비사로 이곳에 왔다. 미국에서 태어난 보글러는 공대를 졸업한 엔지니어였다. 하지만 갑갑한 도시생활을 벗고 자연인으로 살기 위해 대 서양 너머 알프스로 찾아왔다. 케이블카를 점검하는 것이 그의 주업무지 만 쇼르노와 함께 케이블카를 탈 때가 많다. 그는 인생선배이자 알프스 선배인 쇼르노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이제 얼마 뒤면 쇼르노는 이 케이블카를 떠난다. 함께 포즈를 취하면서도 활짝 웃는 보글러와는 달리 얼굴이 확 펴지지 않는 건 그 때문이었을까? 아름다운 알프스엔 아름다운 산사람들이 있었다.

루체른=권태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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