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1997년05월22일 제 158호 한겨레21

애달픈 조국, 영원한 모성

이자경

한 개인에게 있어서 외국에 뿌리를 내리는 이민자의 삶을 선택하는 것은 그 자체가 엄청난 도전이요, 더 나아가 혁명적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언어·피부·관습 등이 전혀 다른 문화권 속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한다는 게 여간 외롭고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태어난 조국의 품 안에서 살다가 그 조국의 흙 속에 묻히 는 것처럼 행복한 사람은 없다든지, 여우도 죽을 땐 제 굴을 향해 머리를 둔다는 말이 생겨났을 법하다. 그야말로 신토불이와 귀소본능을 짧게 잘 표현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인류 역사가 이민의 역사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따라서 어느 시대 어느 부족이나 국가를 막론하고 그 구성원의 일부는 끊임없이 다른 지역 또는 다른 문화권 속으로 떠나갔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또는 모든 현대 인 역시 어디론가로부터 이주해 온 옛 조상들의 후손이라는 좀더 근본적 인 진실을 인정한다면 이민이라는 행위는 오늘에 있어서도 살아숨쉬는 역 사의 일부라는 얘기가 성립된다.

어쨌거나 나는 한국인인 동시에 여성의 한 사람으로 어느덧 20년이나 되 는 세월을 미국(LA)에서 살고 있다. 그 세월은 뿌리를 옮겨다 심는 아픔 과 갈등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시신을 이민의 땅에 묻는 순간 비로소 뿌리를 심고 말았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한인여성 이민 사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누군가 꼭 정리해야될 과제라고 생각해서 였다.

특히 구한말, 풍전등화 같은 망국의 울분과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남편을 따라 하와이 사탕수수밭과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어저귀농장으로 떠났던 여인들, 그리고 사진 한장만 보고 남편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간 이른바 사진신부(Picture-Bride)들은 오늘 해외이민정신의 뿌리로 살아있 는 것은 물론 해외독립운동의 말없는 밑거름이었다.

그분들은 일찍이 대한여자애국단을 창설해 상하이 및 충칭임시정부와 광 복군에 성금을 보내는 데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일제치하, 8·15해방, 6 ·25동란에 이르기까지 조국의 재해민과 난민을 구제하는 일에도 동포애 를 불살랐다.

더욱이 이민회사의 사기에 속아 어저귀농장의 부채노예로 전락했던 멕시 코의 한인어머니들은 노예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남편과 함께 계속 어저귀 농장에 나가 온몸을 가시에 찔려가며 번 돈으로 광복성금과 난민구제에 그 누구보다도 뜨겁게 동참했다는 사실은 오늘의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게 한다. 한일합방이 되었다는 비보를 듣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통곡했던 그들, 귀국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배삯을 한푼두푼 모았던 그들에게 돌 아갈 조국이 없어졌다는 것은 메리다(유카탄 수도)를 통곡의 땅으로 만들 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시대는 변했다. 증기선에 실려 한달 이상을 항해하던 이민의 시대에서 제 트여객기에 편안히 앉아 반나절이면 이민의 땅에 도착하는 시대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조국에 대한 사랑과 이민 어머니들의 모성은 예나 지금이 나 마찬가지이다. 작년 6월20일 LA 40여명의 어머니들은 ‘북한동포돕기 쌀 한 포대 보내기 추진위원회’를 결성, 거리모금에 나섰다.

미주 8개 지역으로 확산된 이 모금운동은 지난해 12월 말 현재 세계식량 계획(WFP)창구를 통해 10만달러의 곡물을 굶주리는 북한주민에게 전달하 기에 이르렀다. WFP쪽은 이 단체가 북한주민을 대상으로 지원한 세계 유 일의 민간단체라고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로 당시 민간 지원은 얼어붙 어 있었던 때였다.

거리성금을 벌이는 동안 과거 초기 이민 어머니들의 발자취를 다시 보는 듯 가슴이 뜨거웠으나 돌발적인 잠수함사건으로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지난 3월16일 공식적인 재개를 선언했지만 성금액이 얼마나 될지는 아 직 미지수이다.

이 짧은 글로 이민여성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어찌 말할 수 있겠느냐마는 그들의 모성은 그 땅에 제3의 문화를 창조하는 뿌리 구실을 할 뿐만 아니 라 조국을 향한 영원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몸살을 앓아왔다는 점은 재삼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이자경
1944년생, 서라벌예대 문창과 졸,
미국 LA거주, 96년 광복50돌기념 ‘해외한국인기록문화상’ 대상 수상,
<제물포에서 유카탄까지> 출간 예정,
현재 ‘북한동포돕기 쌀 한 포대 보내기 LA추진위원회’공동대표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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