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1997년05월22일 제 158호 한겨레21

스케이트에 날개 달았다

(사진/한국전력공사 앞 대리석 보도블록은 스케이트 보드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어서 라이더들의 새로운 해방구로 떠오르고 있다.)

타닥, 타닥, 타닥…. 젖먹은 힘까지 짜내 뒷발로 바닥을 지치다가, 살짝 스케이트 보드 뒤쪽에 올려놓는다. 보드가 매끄러운 대리석 위를 달리며 바람을 가른다. 무릎을 적당히 구부린 상태에서 먼저 앞발을 살짝 들어주 면서 점프를 한다. 뒤쪽이 무거워진 보드가 고개를 빳빳이 들며 앞쪽부터 공중으로 따라 올라온다. 마치 공중에서 보드와 발바닥이 접착제로 달라 붙어 있는 것 같다. 손은 발레동작처럼 양쪽으로 쫙 펼친다. 통큰 힙합 청바지가 ‘펄럭’ 소리를 낸다. 공중에 뜬 상태에서 보드 앞부분을 살짝 건드려주면서 바닥에 착지한다. 해냈다는 성취감이 가슴 한가운데로 쏵 밀려들어온다. 절묘한 알리(점프) 기술. 1m가 넘는 장애물도 점프대없이 거뜬하게 넘을 수 있다.


절묘한 점프·장애물 횡단 등 속출

서울 강남 한국전력공사 앞 대리석 보도블록이 지난 2월 말부터 스케이트 보드의 새로운 메카로 떠오르고 있다. 대리석 바닥이 맨질맨질한 데다, 계단 따위의 적당한 지형지물이 있어 보드를 타는 묘미를 맛볼 수 있는 안성맞춤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60여평이나 되는 넓이도 서울의 여느 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공간이다.

평일에는 10~40명, 주말에는 80~1백여명의 라이더들이 매일 몰려든다. 주 말만 되면 60여평 남짓 되는 공간은 그야말로 ‘대중목욕탕’이나 ‘수영 장’처럼 붐빈다. 평일에는 주로 대학생이, 주말에는 중·고생들이 즐겨 찾는다. 최근에는 ‘H.O.T’가 출연한 텔레비전 광고에 스케이트 보드가 등장하면서 신참 라이더들이 부쩍 늘고 있다.

일부 프로급 라이더들은 이동식 점프대를 갖고와 묘기를 뽐내기도 한다. 점프대를 이용해 공중에 떠서 몸을 360도 틀었다가 착지하는 기술, 몸이 뜬 상태에서 발재간으로 보드의 앞 뒤를 뒤바꾸는 기술 등이 선보인다. 그뿐만이 아니다. 점프대가 없으면 쓰레기통을 갖다놓고 그 위를 뛰어넘 는 알리 기술, 계단을 미끄러지듯이 타고 내려가는 기술 따위의 장애물을 이용한 묘기도 펼쳐진다. 경기고 1학년 이재웅(17)군도 거의 매일 한전 앞을 이용하는 2년 경력의 라이더이다. 세종문화회관을 지나가다가 우연 히 보드타는 멋진 모습에 이끌려 형들을 쫓아다니게 됐다. “한번 보드에 푹 빠지니까, 다쳐도 계속 타고 싶더라구요. 보드만 타고 있으면 그냥 좋 아요. 딴 생각이 안 나거든요.” 덕분에 이군은 형들도 부러워할 만큼의 실력을 갖추고 있단다.

라이더들은 한전 앞으로 모이기 전까지 타다가 쫓겨나기를 몇번이나 거듭 해야 했다. 자칭 ‘수난의 역사’가 숨어 있는 것이다. 집 근처 골목에서 호기심으로 보드를 타던 라이더들이 대학로로 몰려 나오기 시작한 것은 지난 90년 초. 그러나 호시절은 1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91년 초 대학로 가 폐쇄된 것이다. 뿔뿔이 흩어진 라이더들은 대학로 바탕골 소극장 뒤편 골목과 올림픽공원 등을 기웃거리며 쫓겨나는 과정을 반복하다가, 93년 초 드디어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떠돌이 생활 끝 수 있을까

그러나 세종문화회관 ‘경비아저씨’와의 밀월관계도 3년만에 막을 내렸 다. 지난 2월 말 갑자기 ‘시민의 안전을 위해 스케이트 보드를 금지합니 다’라는 팻말이 붙었다. 대리석 일부가 충격으로 깨지고 계단이 새카맣 게 더러워져 시민에게 불쾌감을 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오기로 한두번 타보기는 했으나, ‘전경아저씨’들의 완력에 번번이 눈물을 머금고 후퇴 를 해야 했다. 그때부터 한전 앞 대리석 보도블록이 라이더들의 새로운 해방구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한전쪽에선 아직까지 별다른 간섭 이 없다고 한다.

스케이드 보드 6년 경력의 김련호(26·레미샵 매니저)씨는 “스케이트 보 드는 스포츠라기보다는 젊은이들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일산의 호 수공원이나 어린이 대공원 등 각 공원에 기본적인 점프대라도 설치해줬으 면 좋겠다. 시민들한테도 충분한 눈요깃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용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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