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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경의 우리맛 기행 |
1997년05월22일 제 1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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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더위가 성큼 다가서는 느낌이다.
일부 지방의 한낮 더위가 30도를 오르내리면서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저 절로 배어난다. 자연히 필요 이상으로 물을 마시게 되고, 입맛은 떨어지 게 마련이다. 이럴 때일수록 아침에 간간하면서 영양가 있는 국을 한사발 먹고 나오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 우유라도 한 잔 마시고 출근하는 것이 건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같은 환절기에 지혜로웠던 옛 한국의 주부들은 짭짤한 밑반찬으로 가족 들의 입맛을 살려내고, 모자라기 쉬운 염분도 자연스럽게 섭취하도록 해 몸이 나른해지는 것을 예방해 주기도 했다.
그 짭짤한 주인공들이 바로 장아찌류가 아니었나 한다. 가을철 김장을 담 고 남은 무를 굵은 소금에 막저림해 깊이 묻어 두었던 무 짠지독을 열어 그 진가를 들어내는 시기이고, 군내가 돌아 된장에 박았던 동치미 무도 맛이 들기 시작할 때다.
무 짠지는 적당히 우려내 채썰듯 썰어 시원한 냉수를 타고, 잘게 썰은 쪽 파와 식초라도 몇 방울 떨구면 입이 개운하고 입맛이 살아나는 물 짠지가 된다. 오이지가 나기 전까지는 밥상에서 수저가 자주 오가는 보배 노릇을 하게 된다. 된장에 박았던 무 장아찌도 곱게 썰어 고소한 들기름과 깨볶 음을 얹고, 마늘 파 다진 것으로 무쳐 놓으면 입맛에 짝 붙는 밑반찬이다 . 이처럼 우리 음식은 밑반찬까지도 먹는 시기가 따로 있고, 계절에 따라 그 맛과 진가가 판이하게 구별된다.
서울 종로구 재동에 있는 종가집[764-7303]은 이런 장아찌류를 가짓수대 로 모아 장아찌 정식을 내, 잃었던 입맛을 되찾아 주고 있다.
한상 가득 빈틈없는 상차림을 보면 김치류와 찌게 등 기본찬이 13가지, 7 -8가지의 젓갈류가 있고, 장아찌류가 무려 17가지가 올라 장아찌 정식이 라는 이름을 실감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장아찌 하나하나가 어느 것이나 입에 붙고, 모처럼의 맛깔스런 점심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특이한 것은 그 많은 장아찌의 종류가 무장아찌는 물론 통마늘 장아찌, 풋고추 장아찌, 깻잎 장아찌, 오이 장아찌 등 흔히 볼 수 있는 것에서 산 초 장아찌와 김장 장아찌 등 독특한 것까지 거의 모든 가짓수를 직접 담 어서 쓴다는 것이고, 상에 낼 때도 어떤 것은 한 두점, 또 어떤 것은 조 금 넉넉히 놓아 37가지나 되는 찬 그릇이 앙증스러울 정도로 예쁘게 보이 기까지 한다.
이토록 가짓수대로 조금씩 다 내는 이유는 주인이 순 서울 토박이이고, 서울 종가집의 상차림을 그대로 전승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준다. 4 대가 한집에 살면서 많은 식구가 한 상에서 식사를 나누다 보면 찬 중에 그래도 가장 입맛에 드는 것이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즐겁게 식사를 하 고, 모자라는 것은 얼마든 더 놓아주고 남기는 것이 없게 한다는 서울 사 람들의 깔끔한 성깔이 배어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서울식 상차림의 특성을 최대한 살려 ‘장아찌 정식’이란 이름을 붙여 손님상에 내다보니, 일반 가정에서는 보기 드문 것까지 올려 가짓수 를 최대한 늘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서른가지나 넘는 찬이 하나같이 짭짤한 것들이고, 들기름과 참기름으로 무쳐 고소한 향이 짙게 배어나 저절로 입안에 군침이 돌게하는 별난 상차 림이다. 짜고 맵고 시고 달고 쌉쌀한 5미가 겸비된 강한 자극만큼이나 입 맛을 확실하게 살려준다. 서울 장안에 이런 상차림은 한 곳 뿐일 거라는 주인의 자랑이 수긍할 만하다.
찾아오는 고객들도 대부분 중년이상의 서울 사람들이고, 고향에서 어머니 가 차려주던 알뜰한 상차림이 그리운 젊은 부부들이 어린아이들과 함께 오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분위기도 장아찌 맛 만큼이나 깔끔 하다.
제철 근채류로 담궈 먹는 저장식품
서울 음식은 크게 특성있는 음식이 아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왕실과 사대 부집 양반들이 모여있어 산물이 전국에서 올라왔고, 풍요로운 경기와 황 해도를 인접하고 있어 상차림이 풍성했다. 음식맛도 지나치게 짜거나 맵 지도 않았다.
특히 깔끔한 서울 사람들의 성깔과 함께 짭짤한 밑반찬류가 호남지방 못 지 않았다. 무엇보다 장아찌는 서울 사람들의 식성에 잘 맞는 찬거리 중 의 하나였다.
장아찌는 제철에 나는 근채류를 초나 장에 담궈 숙성시킨 뒤 오래두고 먹 는 저장식품이지만, 오히려 한번 처리했던 근채류를 다시 장이나 된장에 박았다가 익혀서 먹는 것이 더 각별한 맛이 있어 인기를 누렸다. 이런 것 일수록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되어 완성기간이 1년이 넘는 것이 있고, 먹는 시기도 길고 맛이 독특하다.
이렇게 새로운 맛으로 재생시킨 찬류는 반찬이라 하여 궁중의 수라상이나 사대부집에서 일반 가정집에 이르기까지 상차림의 기본이 됐다.
* 장아찌정식은 3인부터 상차림이 가능하고, 한둘이 갔을 때는 보다 실비 로 내는 ‘깡된장의 보리밥’과 ‘열무 비빔밥’등을 먹으면 된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