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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
1997년05월22일 제 1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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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아파트가 주민자치의 실험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지난 5월10일 `상계어머니학교'가 마련한 `공원한마당 축제'에서 주민들이 물물교환시장을 열었다.)
“뭐, 10만원이나 더 나왔다고?”
수원시 구운동 삼환아파트 주민들은 올해 1월 관리비 고지서를 받아들고 부르르 떨었다. 평소 15만원(32평 기준)이면 충분하던 관리비가 하루아침 에 10만원 이상 뛰었기 때문이다. 난방연료가 벙커C유에서 액화천연가스( LNG)로 바뀐 점을 고려하더라도, 인상액수는 주민들이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봉급생활자라면 가계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자치의 힘으로 부당한 ‘관리’ 막는다
수군거림은 이내 외침으로 변했다. 인상 내용을 정확히 알아야겠다는 주 민들의 요구가 뭉쳐진 것이다. 아파트가 생긴 지 5년만에 처음으로 주민 8백여명이 모이는 집회가 열렸다. 90% 이상의 주민들이 기꺼이 지지서명 에 동참했다. 주민대표가 새로 뽑혔다. 이들은 관리비 부과 내용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조사 결과 비정상적인 관리 실태가 그대로 드러났다. 관리비를 올릴 때는 관리업체가 그 이유를 주민들에 알려야 하는데도 지 키지 않았다. 기름의 양을 나타내는 유량계는 봉인(封印)이 뜯어진 지 이 미 오래였다. 난방시간도 들쭉날쭉이었다. 겨울철 하루 평균 난방시간이 6~7시간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17시간 동안 난방을 계속한 날도 많았 다. 청소나 약품 구입은 모두 수의계약이었다. 그곳에 ‘관리’란 없었다 .
투명한 관리비 부과와 책임있는 관리를 강제하기 위해 새로 뽑힌 주민대 표들은 이 참에 완전히 새로운 아파트를 만들기로 했다. 즉시 15개동 1천 6백80세대를 대표하는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에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시민 운동을 벌여온 박천우(장안전문대·한국사) 교수를 내세웠다. 또 주민비 례로 1개동에 1~2명씩 선출되는 동대표에는 아파트 관련 전문가들이 나섰 다. 보일러 전문가, 회계전문가, 설계사, 주택공사 직원 등으로 동대표가 구성됐다. 그곳에 부정과 비리는 발붙일 곳이 없었다.
아파트 관리규약도 민주적으로 개정했다. 주민대표는 주민의 직접선거를 통해서만 뽑도록 했다. ‘주민소환제’도 새로 생겼다. 동대표와 회장 등 입주자 대표들의 잘못이 있다고 판단하는 주민들이 과반수만 넘으면 즉시 해임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이권개입과 부정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경제 관련 전과자는 대표가 될 수 없도록 했다. 동대표나 회장직을 직업시하는 사람들을 배제한 조항이다.
지난달 5백여명이 모인 주민큰잔치가 좋은 반응을 얻자, 이들은 내친 김 에 더 큰 욕심을 냈다. 장기적인 공동체운동의 필요성을 깨달은 것이다. 반상회는 ‘자치회’로 이름을 바꿨다. 상의하달이 아닌 하의상달체계를 갖춘 것이다. 유인물을 돌리는 데 앞장섰던 70여명의 전업주부들이 공동 체 자원봉사자로 나섰다. 대학을 졸업한 전업주부들은 무료로 아이들을 가르칠 준비를 하고 있다. 영어, 서예, 미술 학원에 다니면서 쓰는 비싼 사교육비를 줄이자는 의도다. 이에 따라 관리사무소도 ‘열린 문화교실’ 로 탈바꿈했다. 낮에는 전업주부들을 위한 법률·건강·취미·교양강좌의 교실이 되고, 밤에는 아이들의 공부방이 된다. 주민불편신고센터 구실을 할 ‘민원상담실도 생겼다. “농도 100%의 순수한 주민이 가장 무섭다는 사실을 가르쳐줘야 한다”는 민원봉사실장 최병순(44)씨의 얼굴에는 웃음 이 가득하다.
공동의 문제 산적 “함께 풀 수밖에 없다”
아파트촌이 1968년 마포아파트가 처음 등장한 지 30년 만에 변화를 위한 용틀음을 하고 있다. 이제 아파트는 더이상 ‘외로운 섬’이 아니다. 잠 만 자러 들어가는 베드타운,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기의 대상이라는 이미 지를 걷어내려 하고 있다. 그대신 ‘살기좋은 마을공동체’라는 희망으로 채워가고 있다.
‘아파트공동체운동’으로 불리는 이런 움직임은 현재 다양한 방식으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아파트 밀집지역에서는 예외없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을 “전체 사회의 시민의식이 성장한 결과”라고 입을 모은다. 또 “ 아파트가 대표적인 도시 주거공간으로 자리잡은 데 반해, 그 관리와 운영 은 여전히 불철저하고 비전문적이라는 데서 생긴 필연적 귀결”이라고 평 가하기도 한다. 서울에서는 이미 전체 주택 가운데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 율이 41%(공동주택 59%)에 이른다. 아파트 밀집지역인 노원구는 그 비율 이 80% 이상이다. 건설교통부에 따르면, 전국적인 범위에서도 아파트는 전체주택의 37.5%(공동주택 49.2%)를 차지한다. 대략 1천7백만~2천만명의 인구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는 계산이다. ‘아파트에서 사는 법’은 이 제 현대인의 필수교양과목이다.
아파트운동가들은 아파트가 공동체운동의 조건을 두루 갖췄다는 역설적인 논리를 편다. 시골의 자연마을보다 공동체로서 오히려 더 유리하다는 것 이다.
아파트를 공동으로 관리하는 과정에서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공동의 문제들이 늘 있다는 것이 첫번째 조건이다. 모든 비용을 공 동 부담해야 하는 구조도 의논을 필요로 한다. 그뿐 아니다. 때에 따라서 는 하자보수, 일조권 침해 문제 등 더 적극적으로 풀어야할 문제도 떠안 을 수 있다. 위탁관리의 경우에는 회사와의 관계가 항상 문제가 된다. 이 런 모든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는 자연마을보다 훨씬 동질성이 높다는 점이다. 같은 평형에 사는 이들은 연령이나 경제적 여건이 서로 비슷할 수밖에 없다. 동일한 사회계층이라 는 의식에서 오는 친밀감이나 귀속감보다 좋은 대화의 전제조건은 없다. 관리실, 회의실, 건물 앞 공터 등 공동의 광장이나, 관리사무실의 방송망 이라는 공동의 통신수단도 있다.
시민학교 등 공동체문화 프로그램 개발
아파트공동체운동을 가장 앞장서 일군 지역은 수원이다. 지난 93년 우만 동 주공 임대아파트를 분양하는 과정에서 입주자들의 권리가 침해되는 것 에 맞서 싸운 경험이 운동의 시작이자 밑거름이었다. 3년 동안 계속된 투 쟁을 통해 아파트문제의 구조적 심각성을 깨달은 이들은 이 운동을 장기 적인 공동체운동으로 이어갈 계획을 세우고 지난 95년 제1회 아파트 법률 학교를 시작한다. 아파트가 공동으로 안고 있는 부실공사와 하자보수, 입 주자대표회의 구성 등을 법률적인 면에서 다루는 내용이었다. 3회째를 맞 는 올해에는 사회복지와 환경의 개념까지 포함하는 아파트시민학교로 발 전된 내용을 다룬다.
이 운동은 시의원도 탄생시켰다. 아파트문제에 관한 한 ‘학위없는 박사 ’라는 별명을 얻은 임승태 시의원이 대표적인 경우다. 3년 동안 입주자 대표회의 회장직을 맡아 성공적인 아파트 공동체를 일군 성과를 인정받아 시의회에 진출한 그는 “처음에는 대부분의 입주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나 의무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며 “심각한 문제가 생기 고 권리가 침해되는 상황이 와야 그제서야 관심을 갖게되는 입주자들의 의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아파트 문제와 아파트 공동체 가 꾸기를 지속적으로 펼칠 조직과 교육내용을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 이다. 수원에는 이미 ‘살맛나는 아파트 만들기 시민모임’(대표 이은주) 이 구성돼 활동중이다.
다른 아파트 밀집지역에서도 공동체운동의 분위기는 무르익고 있다. 처지 와 조건에 맞는 창조적 활동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 밀집지역 인 서울 노원구의 경우, 젊은 지방의회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벌이는 공 동체운동이 활발하다. 중계4동에서는 지난 5월10일 삿갓봉 공원을 무대로 ‘상계어머니학교’가 주최한 ‘공원한마당 축제’가 벌어졌다. 초등학생 들은 특활반으로 대학생들은 동아리모임으로 참여했다. 주민노래자랑과 공동체놀이가 이어졌다. 행사를 함께 준비한 유송화 의원은 “아파트를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는 주민들을 상대로 지역의 문화역량을 통한 유대의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주민자치시대에 맞는 주민자치문화를 만들어갈 계 획이다”고 밝혔다. 현재 노원구의회에는 ‘아파트관리제도 개선을 위한 특별위원회’(위원장 임준홍)까지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설문조사를 통 해 주민들이 느끼는 아파트문제의 구체적인 내용을 조사중이다.
노원구와 같은 주민축제는 이제 아파트지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이다. 최근에는 단지별 또는 동별 아파트신문을 발행하는 곳도 있다. 부 부모임, 운동모임 등의 소모임을 통한 인적 교류는 공동체문화를 꽃피우 는 토대가 되고 있다. 부산대 경제학과 황한식 교수를 중심으로 한 금샘 마을 공동체 가꾸기 운동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곳에서는 마을단오단 치, 문학의 밤, 마을주민교양강좌, 주민포럼, 청소년상담교실, 독서토론 교실 운영, 주민취미교실을 몇년째 운영해오고 있다. 지역의 활발한 움직 임에 따라 인천 연수구에는 아파트공동체문화를 연구하는 ‘아파트생활문 화연구소’가 활동하고 있다. 아파트는 이제 시민운동, 소비자운동, 환경 운동 등을 한꺼번에 실험하는 실천의 장이 되고 있다.
자치활동으로 민주주의 원리 터득한다
한편 아파트운동이 일반화하면서 이 운동이 지방자치시대에 풀뿌리민주주 의를 경험하는 소중한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 다. 수원 성환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인 박 교수는 “아파트 단지는 그야말로 지방자치단체이다. 아파트 한 단지는 1개 면이나 동과 같은 규 모의 사회경제적 단위이다. 한 단지에서 1년에 걷히는 관리비는 보통 10 억이 넘는다. 이를 제대로 관리하고 사용하고 감시하는 훈련을 제대로 하 면 민주주의 운영의 기본을 익힐 수 있다. 동대표를 제대로 뽑아야 구의 원, 시의원, 국회의원 나아가 대통령까지 제대로 뽑을 수 있는 것”이라 고 밝혔다.
‘아파트 이웃사촌’ 21세기 바람직한 인간관계로 정착돼가고 있는 것이 다.
김창석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