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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읽기 |
1997년05월22일 제 1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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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광(과학세대 대표)
일요일 아침 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에게 초코우유를 만들어주려고 냉장고 안에서 우유곽을 들어올리다가 무심결에 유효기간 표시에 눈길이 갔다. ‘1997년 5월11일 14시27분.’ 순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달력 과 시계에 부리나케 눈길이 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다행히도 14시27분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다. 우유곽에 써있는 대로라면 나는 14시27분이 지나 는 순간 그 우유곽을 냉장고에서 꺼내 쓰레기통에 던져야 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식의 무의미한 정확성, 아니 좀더 솔직하게 표 현하자면 허구적인 숫자놀음의 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른바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그동안 아무런 불편없이 사용해왔던 시계, 온도계, 각 종 계량기의 문자판과 바늘이 살벌한 숫자만 나오는 액정 표시기로 바뀌 면서 우리들의 두뇌는 기이한 곤욕을 치르게 됐다. 가령 일부 신형차의 속도계는 디지털화되어 바늘 대신 시속이 숫자로 표시된다. 가속 페달을 밟으면 0이라는 계기판의 숫자는 다급하게 증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가 령 80과 같은 숫자는 곧바로 속도감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머리 속에 과거에 익숙해 있던 바늘달린 계기판(아날로그)을 그린 다음, 그 숫자에 맞춰 계기판의 바늘이 어디까지 돌아가 있는지 ‘번역’하는 번거로운 과 정을 거치게 된다. 그런데 차의 속도를 정확한 숫자로 나타내는 것은 불 가능하다. 설령 정확하다 하더라도 그 숫자를 판독하는 순간 이미 차의 속도는 바뀌어 있다. 따라서 차의 실제 속도는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일 뿐이다. 그러므로 ‘아날로그(차의 실제 속도)-디지털(계기판 숫자)-아날 로그(우리가 느끼는 속도감)’의 쓸데없는 복잡화를 초래할 뿐이다.
오늘날 디지털(불연속성 수량화)과 아날로그(연속성 패턴화)의 힘겨루기 는 디지털의 일방적인 승리로 판가름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은 인위적이고 일시적인 승리일 뿐이다. 네그로폰테의 ‘비잉 디지털’을 앞 장서 선전해대는 이른바 디지털의 사도(使徒)들은 반박할는지 모르지만, 우리를 비롯한 모든 생물들의 두뇌의 작동방식, 아니 생명현상 자체가 디 지털이 아닌 아날로그방식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원자 이하의 규모에서 는 ‘띄엄띄엄’, 즉 불연속성의 양자(量子) 법칙이 통용되지만, 생명현 상은 양자 수준(quantum level, 10~15m)이 아닌 분자 수준(10~9m)에서 이 루어진다. 더구나 생물들은 주기성(週期性)을 주요한 특성으로 삼는다. 밤과 낮의 순환, 계절, 나고 죽는 라이프 사이클 등등…. 이 모두는 지구 의 자전과 공전, 그리고 항성의 일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두뇌는 장구한 역사과정을 거쳐 패턴인식을 통한 종합적인 판단에 적합한 방향으로 그 능력을 진화시켜왔다. 우리가 시계를 볼 때 우리의 두뇌는 큰 바늘과 작은 바늘의 위치(패턴)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단번에 알아차린다. 속도계나 계기판도 마찬가지다. 일상생활에서 붉은색으로 칠 해진 경고 속도 영역에서 바늘이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지, 현재 속도나 온도가 소숫점 이하까지 정확히 몇도인가는 실상 중요한 정보가 아니다. 미국의 수학자 존 앨런 파울로스는 <수학자의 신문읽기> 라는 책에서, 전시중인 공룡이 9천만6년 전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연사 박물관 수위의 농담을 소개하고 있다. 그 근거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수위는 사실 그 공룡은 9천만년 전의 것인데 자신이 그 박물관에서 일한 지 6년이 됐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최근 컴퓨터 과학을 비롯한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는 아날로그의 중요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날로그와 디 지털 사이의 편가르기가 아니다. 자연은 어느 한쪽 방향을 특별히 선호하 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김동광/ 과학세대 대표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