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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
1997년05월22일 제 1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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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방글라데시인인 싸술의 방에는 일자리를 잃은 동료들이 한데 모여 산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녹촌리 속칭 마석 가구단지. 평일 오후 2시인데 도 슈퍼마켓 근처에서는 10여명의 외국인들이 하릴없이 서성거리고 있다. 필리핀, 네팔, 방글라데시뿐 아니라 멀리 나이지리아에서 온 이들은 여행 객처럼 한가해 보이기조차 한다. 마치 휴일의 나른한 오후 같다. 그러나 그 한가함 뒤엔 불황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그들은 일하던 공장에서 잘리거나, 일감이 없어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미숙련자 구직은 ‘하늘의 별따기’
방글라데시인 싸술(25)은 요즘 퇴근시간이 빨라졌다. 공장에 남아 할 일 이 없기 때문이다. 공장은 올들어 기계를 놀리는 날이 많아졌다. 사장은 팔리지도 않을 물건을 더이상 만들고 싶지 않단다. 괜히 생산경비만 잡아 먹고, 재고만 쌓인다는 것이다. 그만큼 싸술도 할 일이 없어졌다. 그로 선 해고당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다.
싸술이라고 일손을 놀리고 싶지는 않다. 그럴 수도 없다. 그의 집은 부엌 이 딸린 3평 크기의 조그만 방 하나다. 부엌이라고 대단한 것도 아니다. 문 앞에 놓인 가스레인지와 한칸짜리 싱크대가 고작이다. 수도 시설이라 곤 밖에 있는 화장실에만 설치되어 있어 식수를 물통에 담아서 쓴다. 그 런데도 한달 임대료가 17만원이다. 싸술에겐 만만찮은 비용이다. 여기에 전기세, 수돗세, 난방비를 합치면 한달 생활비만 40만원이 넘는다.
이 조그만 공간에 지금 싸술을 비롯해 6명이 함께 살고 있다. 싸술과 그 의 형을 포함해 모두 방글라데시에서 온 동료들이다. 하지만 공장에 나가 일하고 있는 사람은 단 두사람뿐이다. 나머지는 직장이 없거나, 공장에서 쫓겨나 놀고 있다. 침대 2개와 쿠션에서 두명씩 새우잠을 자야 할 정도로 방이 비좁다. “하지만 우린 호모가 아니에요.” 싸술은 웃으며 묻지도 않은 대답을 한다. “마석 근처에 2백여명의 방글라데시 사람 일해요. 하 지만 일자리 없어서 놀고 있는 사람 많아요. 요즘 한국 불경기 심하데요. ” 토씨를 빼먹는 싸술의 더듬거리는 말투에는 힘이 없다.
싸술은 동료들의 명단을 들고 취업을 알선하러 다닌다. 한국에 온 지 5년 째인 그는 남양주군 일대의 공장 상황에 비교적 밝다. 그러나 그의 품만 큼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다. 입국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 주로 놀 고 있다. 미숙련자들이라 일자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방 너무 좁아요. 하지만 같은 나라 사람인데 도와줘야죠. 일자리 잡으면 갚겠죠. ” 하지만 그의 마음은 그리 편해 보이지 않는다. 지금 마석은 가구업체 들의 불황으로 인원 줄이기가 한창이기 때문이다.
마석은 다른 지역의 공단에 비해 외국인 노동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인구 수로 따지더라도 1천3백여명의 주민들 가운데 외국인 노동자 수가 1천여 명에 이른다. 공단관리사무소 서영수(62)씨는 “이곳에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한 10년 됐다. 전에 양계장으로 쓰던 축사를 개조해 공장으 로 사용한 것이 이제는 약 3백여개 공장을 가진 공단으로 자리잡았다”고 말한다. 허름한 건물이었지만, 업주들은 낮은 임대료 때문에, 외국인 노 동자들은 단속이 뜸하다는 이유로 이곳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한때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잔업과 철야는 물론, 휴일에도 일을 해야 할 정도로 잘나갔다. 그러던 이곳이 불경기의 강펀치를 맞고 휘청대고 있다. “요즘 불경기는 정말 살인적이다. 우리같은 중소기업은 금융이나 세제에 서 혜택받는 것이 하나도 없다. 유통업자들도 영세해 어음 부도율이 높다 . 언제 공장문이 닫힐지 아느도 알 수 없다.” 이 지역 모범업체로 이름 난 (주)협진의 이춘수(40) 사장은 최근 들어 매출이 20% 이상 준 것 같다 고 한다. 신혼방 가구의 오규헌(45) 사장의 이야기는 더 절박하다. “지 금은 혼수철이라 사람이 붐벼야 할텐데 보시다시피 파리만 날리는 실정이 다. 가을까지 어떻게 버틸지 걱정이다.”
손 다친 게 빌미 되어 해고
이같은 불경기의 그림자가 가장 먼저 닥치는 곳은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속칭 3D업종에는 외국인 노동자도 모자랐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 마석에 는 일자리가 없다. 필리핀에서 온 레오(42)는 최근 실업자 신세가 됐다. 작업 도중에 손을 다친 게 빌미가 됐지만, 그것 못지않게 불황 탓이 크다 는 걸 안다. 사장은 경비를 줄일 심산으로 사람을 자르지 못해 조바심을 냈다. “당시 진단이 1개월 나왔어요. 여지껏 빨래도 못하고 친구의 도움 을 받고 살아요. 그런데도 1개월치 월급을 못받았어요. 일자리를 잃고, 월급까지 받지 못해 속이 너무 상해요.”
한국인 업주들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경기가 바닥이라 외국인 노동 자들을 고용할 여력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요즘 외국인들 월급이 평균 80만원입니다. 예전에 비해 많이 올랐어요. 그나마 군말없이 잔업하고 철 야하니까 쓰는 거지, 싸서 쓰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요즘 잔업에 철야할 정도로 일감이 있어야죠. 게다가 산재라도 당해봐요. 같이 죽는 거예요. ” 최근 외국인 노동자 둘을 해고한 가구업체 사장의 이야기다.
이영숙(25)씨는 요즘 고민이 늘었다. 필리핀인 남편 벤자민(29)이 실직했 기 때문이다. 이씨는 2년 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벤자민과 결혼했다. 막상 결혼은 했지만 국적법상 외국인 남편에게는 한국 국적이 주어지지 않았다. 벤자민은 비자기간이 만료될 때쯤이면 중국에 나갔다, 새 비자를 받아서 들어오곤 했다. 필리핀어인 타칼로그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이씨가 그나마 한 공장에서 경리로 일하고, 남편이 몇개월이라도 일을 해 생계를 이어갔다. 그런데 최근 남편이 실직하면서 살림이 더욱 쪼들린다. “요즘 은 남편 고향에서 물건을 받아다가 이곳 필리핀 사람들에게 팔아요. 주로 육가공품인데 생활에 조금 도움이 돼요.”
최근 이들 부부는 딸을 낳았다. 하지만 요즘 형편으로는 아이를 기를 형 편이 못된다. 하는 수 없이 4개월된 아이를 필리핀 가족에게 보냈다. 생 활 형편이 나아지는대로 딸을 데려올 생각이지만 그것이 언제인지는 “지 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고 이씨는 한숨짓는다. 아이를 시댁에 두고올 때 쓰린 마음은 지금도 갈무리하기 힘들다.
“마석은 지금 태풍전야”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나앉으면서 공단 분위기도 나 빠지고 있다. 주민들과의 마찰도 부쩍 늘었다. 서로 싸우고, 비난하고, 외면하는 기운이 팽배해지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의 산재나 임금체불 등 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온 마석 성생원 프란치스교회(이정호 신부)의 한 관계자는 “지금은 마치 태풍전야와도 같다. 공단에 숨어 있는 갈등과 마찰 요인들이 언제 어디서 터져나올지 모른다.”고 우려한다. 불황이 외 국인 노동자들을 실업자로 내몰면서 새로운 사회문제를 예고하고 있는 것 이다.
마석=글·사진 이상엽/ DOCUNET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