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하는 재벌
1997년05월22일 제 158호 한겨레21

두산그룹 1백살, 회춘의 열망

(사진/두산그룹은 지난 2월 1단계 구조조정을 마침으로써 계열사가 종전의 30개에서 25개로 줄었다. 사진은 매각된 OB맥주의 서울 영등포공장.)

 박용오 두산그룹 회장은 지난해 12월 초 취임 이후 전국에 퍼져있는 1 백50여개 사업장을 불시 방문하고 있다. 취임 5개월 동안 거의 하루도 거 르지 않았다. 이제 대부분의 사업장을 돌았고 그 중에는 두번 이상씩 다 녀 온 곳도 있다. 신정, 구정연휴 때도 그의 발걸음은 쉬지 않았다.


‘암행어사’ 박용오 회장

박 회장은 방문계획을 미리 알려주는 법이 없다. 사업약속차 사업장 근처 를 지나가다가 잠깐이라도 틈이 나면 갑자기 들르는 식이다. 수행비서도 없이 운전기사만 동행한다. 가방도 자신이 직접 들고 다닌다. 재계랭킹 1 4위의 재벌그룹 총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이다. 그룹 홍보실에서 도 그의 방문 예정지를 모른다. 설령 알고 있더라도 행선지가 사전에 알 려지면 불호령이 떨어지기 때문에 아예 알려는 노력도 않는다.

그래서 두산그룹 사업장들은 항상 긴장상태다. 입사할 때 한번 본 이후로 는 (역대로 두산그룹 회장은 신입사원 면접을 직접 한다) 퇴직할 때까지 얼굴 한번 다시 보기 어려운 그룹 총수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 그러나 박 회장의 방문은‘암행순시’와는 다르다. 방문목적이 잘못된 것을 찾아내 호통을 치거나 문책하는 데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격려에 무게가 실려있다. 현장을 찾은 박 회장은 사원들과의 직접 대화를 즐긴다. 현장의 어려움과 문제점을 자신의 귀로 직접 듣는 것이다. 박 회 장이 듣고 느낀 점은 바로 경영진에 전달된다. 경영진에게 `‘암행어사’ 인 셈이다.

“침체됐던 회사 분위기가 박 회장 취임 이후 바뀌었다.” 그룹 관계자의 전언이다. 박 회장 본인은 “현장 방문을 통해 상의하달 방식의 그룹 전 략이나 사업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직원들에게 하면 된다는 조직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절실히 느꼈다”고 소감을 말한다. 박 회장은 앞으로도 현장중심의 경영을 통해 신바람나는 조직을 만들고 직원들의 사기를 북돋울 계획이다.

두산그룹은 총수의 변화만큼이나 그룹 경영에도 큰 변화가 진행중이다. 박 회장은 지난해부터 시작된 `두산 ‘리스트럭처링 계획’(DR 플랜) 추 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제 외형경쟁은 의미가 없다. 두자리수의 고성장은 불가능하다. 앞으로는 체감성장률이 3~4%에 그칠 것이다. 저성 장시대에는 외형보다는 수익성을 높이고 현금흐름을 개선하는 것이 관건 이다.” 두산그룹 구조조정의 사령탑이라 할 수 있는 트라이 씨(Try-C)팀 김철중 상무의 말이다.

지난해말 증권가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확산된 자금난 루머를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도 미리 착수한 구조조종 덕으로 볼 수 있다. “기업들이 어려움을 예견해 미리미리 구조조정을 시작한 사례는 드물다. 그동안 내 부 갈등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는 설득이 주 효했다.” 트라이 씨팀 관계자의 말이다. DR 플랜 마련과 추진은 미국의 유명 경영컨설팅회사인 매킨지와 함께 하고 있다. 컨설팅비만 30억~4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DR 플랜의 핵심은 세가지다. 첫째는 계열사 및 유사업종간 통폐합을 단행 해 시너지 효과를 얻는 것이다. 둘째는 노동집약적이고 수익성이 낮은 사 업은 과감히 잘라내는 사업구조 조정이다. 셋째는 자산의 효율적 운용을 위해 경영권이 없는 단순 주식지분이나 부동산을 팔아 버리는 것이다.


계열사 통폐합·자산 매각 등 활발

두산그룹은 지난 2월 1단계 구조조정을 마쳤다. 이 기간에 두산그룹 계열 사는 종전의 30개에서 25개로 줄었다(그림 참조). 두산종합식품은 두산음 료에 합병됐다. 두산창업투자, 두산렌탈, 두산환경산업, 동아인쇄 등 4개 사도 두산동아와 합쳐졌다. 두산개발의 건설분야는 두산건설로 넘겨졌다. OB맥주의 경우도 와인사업은 두산백화로, 외식사업은 두산음료로, 이천 열병합발전소는 두산건설로 각각 이관했다. 이를 계기로 간접부문 인력 3 0%를 영업현장에 전진배치할 수 있었다.

두산상사는 의류·피혁 제조, 인삼가공, 수산물 양식·유통업 등을 포기 했다. 두산음료의 유가공업, 두산기계의 자판기 및 상업용 냉장고 사업, 두산유리의 크리스탈 및 프라스틱 팔렛 제조업, 두산농산의 과수재배업, 두산개발의 조경, 환경사업 등도 모두 정리됐다. 이로 인한 연간 손익개 선도 2백40억원에 이른다.

자산매각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OB맥주의 서울 영등포공장 매각, 두산건 설의 한국네슬레 주식, 두산상사의 한국코닥 주식, 두산음료의 한국3M 주 식 매각 등으로 3천3백20억원의 매각수입이 확보됐다(표 참조). “자산매 각으로 지난 한햇동안만 1천23억원의 현금이 들어왔다. 계열사 통폐합, 사업구조 조정, 조직의 슬림화를 통해 7백37억원의 세전이익이 개선되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룹 홍보실 김진 이사의 설명이다.

올 3월부터는 2단계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2단계 구조조정은 올해 말까지 끌낼 계획이다. 최근 두산음료와 OB맥주의 합병계획이 발표됐다. “2단계 구조조정 사업을 통해 올해만 7천7백60억원의 현금이 새로 들어오게 된다 . 오는 99년까지는 그룹 자산의 13%에 해당하는 8천3백50억원의 현금이 유입된다.” 김철중 상무는 유입된 현금은 재무구조 개선과 유망 신규사 업 진출에 투입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지난해말 현재 4조1천억원에 이 르는 그룹 부채가 올해말까지는 3조2천억원 선까지 감소한다. 부채비율이 500%에서 350%로 낮아지고 자기자본비율도 13.4%에서 18%로 올라간다.” 재무구조 개선 효과가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는 설명도 곁들인다.

그러나 1백살을 먹은 두산이 회춘(回春)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 다.

두산의 위기를 몰고 온 주범은 모기업인 OB맥주의 부실이다. OB맥주의 위 기 신호는 이미 지난 94년부터 표면화됐다. OB맥주는 93년까지만 해도 국 내 맥주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94년 조선맥주의 하이트, 진로의 쿠어스맥주가 나오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시장 점유율이 뚝뚝 떨 어지더니 지난해에는 급기야 맥주시장 1위 자리를 조선맥주에 내주는 치 욕적인 상황을 맞았다. 94년 이후 매출도 매년 감소하고 있다. 적자도 지 난해 9백64억원을 포함해 지난 3년간 2천8백억원을 넘고 있다. 부채비율 은 9,445%에 달한다. OB맥주가 흔들리자 그룹 전체가 흔들렸다. 증권가에 서 자금난 루머가 돈 결정적인 이유도 OB맥주의 부진 때문이었다.


재계랭킹, 1년 사이 두단계나 추락

OB를 제외한 다른 계열사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상장기업인 두산 기계는 지난해 1천6백12억원의 매출을 올리고도 1백16억원의 적자를 기록 했다. 92년 이후 4년간 누적적자가 7백69억원에 달한다. 매출액이 4천억 원에 이르는 두산음료도 장부상 35억원의 흑자를 기록했지만 한국3M 및 한국네슬레 주식매각에 따른 특별이익 2백24억원을 빼면 사실상 적자상태 다. 두산그룹이 완전히 정상화되기 위해서는 구조조정 이상의 것이 요구 되는 것이다. 군살을 빼고 잘라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금까지의 구 조조정은 말 그대로 자구노력이다. 좀더 많은 이익 창출이라는 성과로 이 어져야 한다. 두산그룹은 지난 95년 5조4백84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그러 나 지난해에는 그룹 총매출이 4조9천억원으로 감소했다. 그룹 전체로는 적자 상태다. 그룹 전체의 경쟁력 상실은 재계랭킹이 지난 1년 사이 두단 계나 떨어진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두산은 올해 5조7천억원의 매출과 2천억원의 흑자 기록을 목표로 하고 있 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OB맥주의 정상화가 시급하다. OB맥 주가 대규모 적자를 내는 한에는 그룹의 정상화가 어렵다. “현재 오비의 시장점유율은 42%다. 그러나 수도권에서는 하이트를 물리치고 1위 자리를 되찾았다. 서울의 우세가 지방으로까지 확산되는데 6~8개월 정도가 소요 된다. 올해말에는 점유율 45%로 다시 맥주시장 1위 자리를 탈환하게 될 것이다. 수익면에서도 적자 탈피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룹 관계자는 자신감을 보인다. 그러나 경쟁업체들도 놀고 있지 않다. 하이트맥주는 오 는 6월 홍천공장이 준공되면 생산능력이 현재의 82만㎘에서 1백17만㎘로 늘어나고, 진로도 시장점유율을 현재의 20%에서 25%선으로 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경기불황으로 전체 맥주시장 규모는 정체 내지는 줄어드 는 추세다. 업계의 공통된 숙원인 맥주세율 인하(현행 130%) 요구를 정부 가 받아들일지 여부도 여전히 미지수다. 시장은 한정돼 있는데 공급이 늘 어나면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오는 10월 두산음료와 합병하더라도 코카콜라가 국내 직영생산 및 판매체 제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부담으로 남는다. 코카콜라가 아직은 표면화시키지는 않고 있지만 결국은 두산음료가 가지고 있는 서울 , 경기, 강원 지역의 판매권까지 회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업계 관계 자들의 전망이다.

그러나 두산그룹은 경영개선이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는 자평이다. “올 1 /4분기 매출에서 전년 대비 13%의 높은 성장을 이루었다.”


신규투자·세계화 전략도 큰 변수

두산그룹의 신규 투자사업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문제도 관건이다. 두산 은 그룹의 사업군을 생활문화, 기술소재, 정보유통 등 3개로 크게 구분하 고 수익성이 높고 미래지향적인 정밀화학, 레저, 유통 등 고부가가치사업 으로 전환한다는 계획이다. “남의 떡이 커보인다고 다른 그룹들이 하는 자동차, 전자 등 신규사업에 뛰어 들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1위를 고수 하고 있거나 조금 더 노력하면 1위를 할 수 있는 계열사는 살리고 나머지 역량은 정밀화학, 레저, 유통 등에 집중해 올해에만 3천3백억원을 투자할 방침이다.” 정밀화학 분야에서는 고순도 지질(脂質)을 개발해 전북 익산 에 공장을 짓고 있다. 레저에서는 지난 4월 춘천에 1차 콘도를 개관한데 이어 2차 콘도와 수상위락시설인 마리나사업을 추진중이다. 오는 2001년 에는 강원도 강릉에 종합레저타운인 두산랜드를 개장할 계획이다. 유통분 야에서는 오는 9월부터 두산상사가 세계 1위의 통신판매기업인 독일의 오 토사와 손을 잡고 통신판매업을 시작한다. 99년 초에는 서울 동대문의 의 류도매센터 두산타워를 개장할 예정이다. 또 두산동아와 두산정보통신을 중심으로 데이터베이스 서비스와 멀티미디어사업을 전개할 계획이다.

두산상사에서 잔뼈가 굵은 박 회장은 세계화 전략에도 적극적이다. 그룹 의 주력인 주류, 식음료사업을 무기로 유리, 제관(캔용기), 왕관(병마개) 등 포장업 관련 계열사를 묶어 공동으로 세계시장에 진출할 계획이다. “ 2001년까지는 해외사업장을 현재의 16개에서 1백45개로 늘려 그룹 매출액 의 20%를 해외시장에서 올릴 계획이다.” 그러나 세계화 전략의 구체적인 청사진은 아직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구조조정에 대한 의지가 다소 이완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두산은 애초 계열사 통폐합을 통해 오는 98년까지 계열사수를 30개에서 1 9개로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24개까지 준 상태(OB맥주와 두산음료 합병 포함)에서 멈췄다. 애초 추진됐던 두산건설과 두산엔지니어링의 합 병은 사실상 백지화됐다. OB맥주와 두산농산, 오리콤과 DYR, 두산동아와 한국도서보급의 합병은 검토 수준으로 약화됐다. 연내 추가 합병대상은 두산씨그램과 세계양주 정도이다. 목전의 위기를 벗어날 조짐이 보인다고 구조조정 노력의 꼬리를 내린다면 더 큰 위험이 초래될 수있다. 두산은 9 2년 낙동강 페놀 방류사건으로 맞은 그룹 최대위기를 벗어나는 듯한 시점 에서 다시 위기를 맞았다.

곽정수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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