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1997년05월22일 제 158호 한겨레21

불황탈출, 재벌이 걸림돌

(사진/주차장에 갇힌 자동차 재고. 현재의 불황은 재벌중심의 경제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업구조조정이라고 부를 만한 게 과연 있기나 합니까?”

올들어 재벌들이 잇따라 내놓은 기업구조조정 계획에 대한 경제전문가들 의 평가는 차라리 냉소에 가깝다. 재벌들이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변 죽만 울렸을 뿐,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 정작 필요한 군살빼기에는 전혀 나서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재벌경제 비효율성부터 타파해야

한 국책연구소의 연구원은 “도대체 불황이 언제 끝날 것이냐”는 물음에 “그것은 재벌에게 물어보라”고 대답했다. 경기침체가 경제구조의 문제 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나서지 않는 한 이번 불황은 그만큼 오래갈 것이라는 지적이다.

주요 재벌그룹이 내놓은 구조조정 계획을 살펴보면 이렇다. 우선 지난해 부터 한계사업 철수에 착수한 삼성그룹은 오는 99년까지 경비효율을 30% 까지 낮춘다는 계획 아래 매출액 1조원 규모에 이르는 20여개 생산품목을 내년 말까지 중소기업에 넘겨주거나 손을 떼기로 했다. 삼성은 또 2000년 까지 투자규모를 당초 70조원에서 40조원으로 줄이고 한계사업 정리에서 생긴 여력을 자동차, 전자 등 주력분야에 투자한다는 방침이다. 현대그룹 도 중공업 철굴구조물부문 등 12개 사업을 중소기업에 넘기기로 했다. 현 대는 특히 사업구조 고도화에 경영 초점을 맞춰 앞으로 기술개발투자를 해마다 10% 이상씩 늘려간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재벌그룹이 비슷한 정도로 내놓은 이런 계획들은 그룹 전체의 규모에 비춰볼 때 턱없이 규모가 작고, “부실한 사업부문 가운데 일부를 중소기업에 넘기겠다”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방만한 계열사를 정리하고 핵심사업을 설정해 이에 주력하겠 다는 의지가 엿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재벌들은 유통산업 진출( 삼성), 반도체 투자확대와 철강사업 진출(현대), 미디어산업 진출(선경) 등 이미 벌여놓은 사업에 투자를 확대하고 신규사업에 뛰어들려는 의지만 더욱 다지고 있는 형편이다.

30대 재벌 가운데는 그래도 LG그룹이 “한계산업은 물론이고, 현재 수익 성이 있고 시장점유율이 높더라도 장기적으로 1등을 할 수 없는 사업은 과감히 정리하겠다”며 구조조정에 적극적인 편이지만, 반도체, 전자, 화 학·에너지, 유통·건설 등 4개 부문에나 주력산업을 설정한 것에서 볼 수 있듯 국민들이 기대하는 정도와는 아직도 거리가 멀다.

그동안 `‘고비용 저효율 구조’가 구조적 불황을 불렀다며, 이를 타파하 기 위해 노동자와 정부를 겨냥해 임금안정과 불필요한 경제규제 철폐의 목소리를 높여온 재벌들이 정작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요구에는 딴전을 피우고 있는 셈이다.

경제전문가들과 정책당국은 “덩치만 커질대로 커진 재벌경제의 비효율성 을 타파하지 않고서는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어떤 노력도 결국 공염불 이 되고 말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동안 몇번이나 놓쳐버린 구조조정 의 기회를 이번에 또 놓쳐서는 우리 경제의 앞날이 깜깜하다는 것이다. 재벌의 구조조정 필요성은 지난해의 30대 그룹의 경영지표만 살펴봐도 분 명히 드러난다. 30대 재벌그룹은 지난 한해 동안 무려 1백50개나 계열사 를 늘렸다. 이에 따라 30대 그룹 상장계열사의 매출총액은 16.2%가 늘었 지만, 순이익은 무려 90%나 줄어들었다. 이들 기업들의 재무구조도 더욱 악화돼 자산 가운데 부채가 차지하는 비율이 83.1%에서 84.1%로 늘어났다 . 재벌들은 문어발처럼 계열사를 늘리면서 은행에서 돈을 빌려 실속없는 장사를 계속한 것이다.


“문어발 과감히 잘라라”

더욱이 상장사들의 토지·건물 등 부동산 보유규모가 22.7%가 늘어난 것 은 재벌들이 경기침체의 와중에도 부동산투자에 열을 올렸음을 보여준다. 한보와 삼미가 쓰러지고, 진로가 위태로워진 것도 이런 방만한 문어발식 경영의 결과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최근 쌍용그룹은 쌍용정공 등 3개 계열사를 다른 계열사에 합병하고 동서 고속관광을 매각하는 등의 내용을 뼈대로 한 비교적 큰 폭의 구조조정 계 획을 발표했다. 쌍용은 이에 대해 “유사업종을 통합해 시너지 효과를 내 고 그룹기구의 군살을 빼 경영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지 만, 쌍용의 이런 결정이 그동안 누적적자가 5천억원에 이르는 쌍용자동차 를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OB맥주를 두 산음료와 합병하는 등 5개 계열기업을 합병하기로 한 두산그룹의 결정도 기업을 살리기 위한 자구책일 뿐 경쟁력 향상을 위한 적극적인 차원의 구 조조정으로 비춰지지는 않는다.

유시왕 동서경제연구소장은 “정작 지금 필요한 것은 부도위기에 봉착한 한계기업을 정리하는 차원을 넘어, 경쟁력이 떨어지는 계열기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핵심기업만을 중점육성하는 방향으로 기업체질을 근본적으로 바 꾸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시장이 국제적으로 개방되는 마당에 국내에서의 1등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서 “최고의 경쟁력을 갖 춘 기업치고 여러 업종에 걸쳐 계열사를 거느리는 경우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지난 5월8일 전경련이 월례 회장단 회의에서 정부에 건의한 내용 을 보면, 현재의 경기침체를 바라보는 정부와 재계의 시각차는 여전히 크 다. 전경련은 이날 기업구조조정 문제에는 일체 입을 다문 채 “통화당국 이 제기능을 다하지 못해 기업들의 자금경색이 심화되고 있다”면서 “기 업의 자금난 해소를 위해 통화를 더 늘려야 한다”고 건의했다.

통화당국의 반응이 차가웠음은 물론이다. 자금을 풀어놓으면 재벌들이 기 업구조 조정은 뒷전으로 미뤄둔 채 재고를 쌓아두면서도 생산을 계속하도 록 도와주는 결과만 낳는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은 `‘우리나라 설비투자 패턴의 특징과 시사점’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우리나라 기업들이 기술 개발을 비롯한 장기적 경쟁력 확보를 위한 투자는 게을리 하면서 빚을 끌 어다가 외형을 확대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불황을 극복 하기 위해서는 문어발을 과감히 자르고 부동산을 처분하는 등 재무구조 개선에 더 힘쓰라는 주문이다.

물론 구조조정 과정에서 해고의 불안을 느끼는 노동자들의 반발이 과감한 계열기업 정리를 어렵게 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한구 대우경제연구 소장은 “중소기업에 사업부문을 넘기려면 시설과 함께 인력도 넘겨야 하 는데 이때 노동자들이 반발하게 마련”이라면서 “그러나 정부는 그런 일 이 생길 때마다 기업들만 탓해오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그러나 이는 그 동안 재벌그룹의 부도로 부실기업을 다른 기업에 떠넘기는 과정에서 빚어 진 일로, 기업이 구조조정을 꺼리는 핑곗거리가 될 수 없다는 견해가 전 문가들 사이에는 지배적이다.


정부,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설까

오히려 학계의 인사들은 재벌의 구조조정을 강제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보 다 강력한 정책의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필상 고려대 교수는 “정 부의 적극적 의지가 개입되지 않고서는 오히려 부도사태를 무기삼아 정부 를 위협해온 재벌이 스스로 군살빼기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정 부가 재벌기업의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지침을 마련하고, 계열 전문화를 유도하기 위한 정책을 좀더 적극적으로 펴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 시왕 소장도 “정부가 일정기간 동안 기업의 구조조정 시한을 정해두고 그뒤부터는 부실기업을 과감히 부도처리하겠다고 선언해야 한다”고 말했 다. 그러나 당국자들이 기업에 구조조정을 촉구하고는 있지만 개혁의지를 잃어버린 정부가 얼마만큼 적극적으로 기업의 구조조정을 밀고나갈지 아 직은 미지수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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