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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
1997년05월22일 제 1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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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점에서 경기논쟁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현 경기침체는 경기 순환적인 측면보다도 우리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에서 기인하다. 고비용 저효율 구조를 치유하고,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성장가능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다. 정확히 알 수도 없고 생산적이지도 않은 논쟁을 할 필요 는 없다.” 한국은행 고위 관계자가 최근 경기논쟁을 지켜보면서 던지는 말이다.
경기판단은 ‘과학’이 아닌 ‘예술’
경기순환곡선상의 경기고점(高點)이나 저점(底點) 결정은 통상 실제 시점 에서 2년 가까이 지난 뒤 이뤄진다. 각종 경제지표 분석을 포함한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경기고점과 저점 판단은 과 학(Science)이 아니라 예술(Art)이라는 이야기까지 있다. 실제로 지난 93 년 1월에 시작된 현 제6순환기의 고점이 95년 10월인가 아니면 96년 1월 인가를 놓고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이런 경기판단 문제를 놓고 최근 정부와 경제계, 민간경제연구기관간에 ` ‘미묘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 경제가 과연 긴 불황의 터널을 빠져 나오고 있는가, 아닌가를 둘러싼 입씨름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경기가 올 1/4분기에 바닥을 쳤다는 인식이다.
판단 근거로는 몇 가지가 꼽힌다. 우선 재고율이 낮아지고 출하율이 올라 가고 있다. 재고율은 지난해 2/4분기 20.1%로 꼭지점을 이룬 뒤 하강곡선 을 그려 왔다. 올 들어서는 지난 1월 15.5%, 2월 13.6%, 3월 13.8%로 더 욱 낮아졌다. 반면 출하율은 지난 1월 2.2%를 바닥으로 해서 2월에는 5%, 3월에는 5.7%로 높아졌다. 통상 경기 수축기의 막바지에 나타나는 양상이 다. 불황기에는 제품들이 안 팔려 재고가 늘고 기업들은 자연 생산을 줄 이게 된다. 회복기에는 그 반대 양상이 나타난다.
생산이나 수출, 도소매 판매, 내수용기계설비 출하 등 각종 지표도 미약 하나마 회복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수출은 반도체, 철강, 석유화학 등 주력상품들의 가격 경쟁력이 일부 회복되면서 4월 중에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7% 늘어났다. 수출이 증가세를 보인 것은 올 들어 처음이다. 반면 수입 증가율은 1.7%에 그쳤다. 수출 증가율이 수입 증가율을 상회한 것도 지난해 6월 이후 처음이다. 무역수지는 계속 적자상태지만 3개월째 개선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경제 성장률도 올 1/4분기가 바닥이라는 판단이다. “국내총생산(GDP) 성 장률은 1/4분기가 5% 정도로 가장 낮을 전망이다. 성장률은 총제적인 경 제활동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약간 차이가 날 수 있지만 성장률과 경기는 기본적으로 흐름을 같이 한다.” KDI 관계자의 설명이다. 통계청도 내부 적으로 1/4분기 GDP 성장률을 5% 약간 넘는 선으로 추정한 것으로 알려졌 다.
종래의 경기순환곡선 흐름에도 들어맞는다. 그동안 경기 확장기(경기저점 ~고점)의 평균 기간은 33개월, 수축기간(경기고점~저점)은 17개월이었다. 현 제6순환기의 정점을 대략 95년 말로 잡으면 예상 저점은 올 상반기말 에 해당된다.
이런 지표상 경기와 피부로 느끼는 체감경기엔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 이다. “체감경기가 부진한 것은 기업의 채산성 악화에 기인하다. 5대 재 벌그룹의 지난해 경상순이익은 95년에 비해 75%나 감소했다. 이로 인해 기업의 투자여력이 약화되고 임금상승세 둔화와 실업증가는 소비를 크게 위축시켰다.” KDI 김준경 연구위원의 진단이다.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는 조급증?
통계청도 공식 의견은 안 내놓고 있지만 경기저점에 근접한 것 같다는 데 는 KDI와 생각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경기저점이 오지 않았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재고수준 이 아직 높다. 국내 수요 부진이 지속되고 엔화 약세도 계속돼 수출증대 효과가 제약되고 있다.” 지난 5월6일 전국경제인연합회 부설 한국경제연 구원은 경기저점은 올 4/4분기 이후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은도 신중한 입장이다. “경기순환기별로 다소 차이가 있지만 통상 경 기저점기의 재고율은 2~7%선으로 지금보다 낮았다. 수출 실적도 지난해 4 월 수출이 워낙 급락했던 데 따른 반사효과일 뿐 전체적으로 수출이 회복 된다고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일부에서는 경기저점 근접 주장을 장기불황에서 벗어나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는 조급증이 빚은 결과로 치부하는 시각도 있다.
이처럼 어려운 경기흐름 진단을 놓고 논란을 벌이는 것은 그 결과가 경제 정책운용의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경기가 내리막길을 걸을 때는 경기급 랭을 막고 연착륙시키기 위해 통화공급이나 재정지출 확대 같은 부양성 정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게 된다. 그러나 경기가 저점을 지나 확장 기로 들어서면 부양보다는 경기안정쪽으로 경제운용의 초점이 바뀌게 된 다.
경제정책과의 연관성 때문에 경기진단에는 판단 주체의 이해관계가 반영 되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이해관계에 따라 자의적 판단을 할 소지가 있 는 것이다. 한국경제원구원의 경기판단에는 재계의 입장이 반영돼 있다고 봐야 한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저성장국면에서 경상수지 적자가 확대되 고 물가압력이 상존하는 취약한 경제여건에서 중장기적인 경제체질 강화 를 목표로 한 긴축적인 거시경제운영은 경제주체들의 심리적 위축을 가져 오고 결과적으로 경기와 성장의 급락을 초래할 수 있다”고 정부의 안정 정책에 화살을 겨누었다. 또 2조원의 재정지출을 삭감하려는 정부계획은 현재의 냉각된 경기를 더욱 얼어붙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를 곁들 였다.
전경련 회장단은 지난 5월8일 “한보사태 등으로 인한 금융경색으로 기업 들이 어려움을 겪는데 중앙은행이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는다”고 한은 을 비난하며 이에 호응했다. 통화공급 확대 등 금융시장 안정화방안을 빨 리 내놓으라는 주문도 있었다.
그러나 정부나 한은은 재계의 이런 주장에 부정적이다. 이번 불황은 단순 히 경기순환적인 측면보다는 구조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지금은 단기 적인 경기대응보다는 구조적 문제를 치유하고 과거에 쌓인 거품을 걷어내 는 데 힘을 쏟는 것이 중요하다는 시각이다.
‘경기저점=경기회복’ 성립 안돼
이경재 한은 총재는 지난 5월8일 “고성장과 고물가의 경제기조를 안정성 장·저물가 기조로 전환해 연간 성장률과 물가상승률을 5~6%대 및 2%대로 안정시키면 금리도 자연스럽게 연 7~8%대로 내려갈 것”이라며 금리안정 을 위해 통화공급을 늘리라는 재계의 요구를 일축했다. 이 총재는 또 “ 기업들은 문어발식으로 벌여놓은 사업들 가운데 수익성이 낮은 비효율적 인 부문을 정리하는 구조조정을 서둘러야 한다”고 오히려 기업들의 자구 노력을 촉구했다. “통화는 금리동향은 물론 장기적인 물가안정 등의 문 제를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경기 차원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구조조정은 이제 시작단계에 불과하다. 성장률이 떨어지더라도 구조와 체 질 개선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구조개선 노력에 힘을 기울이고 안정기조 를 다지는 정책방향은 달라질 것이 없다.” 정지택 재경원 경제정책 심의 관은 통화와 재정을 더 풀라는 재계의 주장은 ‘거꾸로 가자는 이야기’ 라고 말한다.
경기저점을 지나더라도 경기회복 속도는 상당히 느릴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지금까지는 저점에서 2분기 정도 지나면 성장, 수출, 투자 등 각종 경제지표들이 뚜렷이 개선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 경기저점 통과 이후 경기순환곡선 그래프의 모습은 경기가 바닥을 치고 바로 회복세로 반등하는 ‘V자형’ 보다는, 경기저점 상태가 당분간 유지 된 뒤 완만한 회복세로 돌아서는`‘U자형’이나 경기저점 상태가 앞으로 상당기간 이어지는 ‘L자형’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경기 저점 도달=경기회복’이라는 등식이 더이상 성립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올 하반기 중에는 수출이 세계경제의 호조와 원화가치 절하를 배경으로 증가세가 점차 확대되겠지만 투자 및 소비의 둔화로 대체로 옆걸음질치는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 한은 이상헌 조사1부장의 진단이다. 엔화 전망이 아직 불투명한 데다 한보사태 이후 금융권의 여신심사가 엄격해지 고 있고 올 연말 대통령선거에 따른 불확실성이 높은 것도 경기의 본격회 복에 장애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일부 민간경제연구소들은 본격적인 경기 회복이 내년 초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내놓고 있다.
곽정수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