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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1997년05월22일 제 1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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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일/ 경남대 교수·사회학
지난 겨울의 총파업 투쟁을 통해 한국의 노동운동, 특히 민주노총으로 결 집된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1987년 이후 10여년간 축적된 운동역량을 유 감없이 보여줬다. 많은 문제점과 한계가 드러난 것 또한 사실이지만, 적 어도 이제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와 진보적 사회개혁의 지속을 위해서는 민주노조운동 세력이 그 핵심주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은 분명해진 듯 하다. 노동운동 주체들의 어깨도 그만큼 더 무거워진 셈이다.
‘백기’를 드는 노동조합
그러나 지금 노동현장의 분위기는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경제위기의 분위기가 압박하는 가운데 특히 고용불안 문제 때문에 여러 사업장에서 임금교섭을 포기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나아가 노사화합 선언 등 사실상 노동조합이 사용자에게 ‘백기’를 드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그렇지 않은 사업장들도 “고용이냐, 임금인상이냐”의 양자택일을 강요 하는 사용자에 맞서 효과적인 대응책을 찾지 못해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세계화와 무한경쟁의 시대에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갈등과 투쟁의 노사 관계를 대화와 협력의 노사관계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 정부와 사 용자들이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개별기업 수준에서는 사용자들 이 “이 경제위기 속에서 우선 회사가 살아남아야 하지 않느냐”고 나설 때, 노동조합의 처지는 답답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 은 비단 우리만이 아니라 사실상 전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유사한 모 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서구의 여러 노동조합들이 고용 유지를 조건 으로 임금 동결에 합의했던 것이 그 좋은 예다. 그러면 한국의 노동조합 도 불가피하게 그런 선택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 서 우리 노동운동의 딜레마, 나아가서는 우리 노사관계 전체가 안고 있는 딜레마가 드러난다.
우선 현재 한국의 1천2백만 노동자 중 노조 조합원은 1백60만 정도에 불 과하고(조직률 12.4%), 그나마 이 조직률도 대부분 중소기업이 아니라 대 기업 노조들에 의해 대표되고 있다. 그리고 조직화된 1백60만 노동자들은 모두 6천7백여개의 잘게 쪼개진 기업별 노조로 분산돼 있다. 한 기업의 울타리 안에서도 하청 노동자나 임시직, 파트타임 노동자 등을 제외한 정 규직 노동자만이 노조에 가입하고 있으며 직종별, 직급별로도 차별화돼 있다.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 모두 이 극단적으로 파편화된 독립적 기업 별 노조들의 연맹체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설사 노사가 ‘합의’를 한 다 해도 그 합의의 효과는 ‘전체 노동자’는 물론 ‘전체 조합원’에게 도 고르게 적용될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합의’ 는 결국 기업별로 이뤄질 수밖에 없는데, 각 기업들은 상호경쟁 관계에 있으며 나아가 재벌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는 엄청난 ‘지불능력의 격 차’까지 엄존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결국 우리의 ‘합의’란 기업별로 노사가 똘똘 뭉쳐 다른 기업과 죽자사자 경쟁하거나, 유리한 위치의 기업 (대기업)이 불리한 위치의 기업(중소기업)을 착취하여 그 떡고물을 나눠 갖는 결과를 빚기 십상이다. 여기에 아예 노조조차 없는 85%의 노동자들 은 어떻게 해야 할까? 독일 금속노조와 사용자단체가 임금동결-고용유지 에 ‘합의’했을 때, 이것은 산하 3백만명의 조합원은 물론 경영참가 제 도(공동결정 제도)의 보완효과로 조합원이 아닌 여타 노동자들 모두에게 그 효력을 미치는 것이라는 점과 선명히 비교되는 일이다. 노동운동이 지 향하는 핵심적인 가치가 노동자적 ‘연대’라 한다면, 우리는 사용자와의 ‘합의’가 곧바로 노동자들간의 ‘연대 파괴’를 초래하는 악순환의 고 리 속에 있는 셈이다.
산별 단일노조 늦출 수 없어
한국 노동운동의 지도부들은 이미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울산의 현대중 공업 노조가 지금 ‘노조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를’ 혹독한 조건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회사가 요구하는 ‘노사화합 선언’을 거부하고 버티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민주노총이 임금인상 요구율을 대기업과 중소기 업별로 차등화하고, 교섭권 위임을 통한 연맹별 공동교섭을 모색하고 있 는 것도 바로 그런 노력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그 정도로 극복될 수 있는 정도가 아닌 듯하다. 노조조직 자체를 진정한 연대 조직 으로, 산별 단일노조로 재편해가는 일을 더 늦출 수는 없어 보인다.
지난 10년이 기업별 노조들간 연대활동의 강화를 통해 노동운동의 발전을 꾀해 온 기간이었다면, 이제는 이를 기반으로 연대적 노동운동의 질적 도 약, 즉 노동자들을 하나의 조직으로 재규합해가기 위한 획기적 노력이 요 구되는 시기가 아닌가 한다. 그 토대 위에서야 비로소 노동운동의 정치세 력화 또는 전체 사회운동에서 우리 노동운동이 요구받고 있는 중심적 역 할의 수행도 가속화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미 일부 노조들은 그 길로 ‘반 보’는 접어들었다. 차제에 ‘큰 한걸음’을 내딛어보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