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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
1997년05월15일 제 1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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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총리관저인 다우닝가 10번지에서 지지자들에 환호하는 블레어와 그의 부인. 영국의 유럽연합 정책에도 변화가 있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73주 뒤에 우리도 똑같은 일을 해낼 것입니다(독일 사민당).”
“영국에서 쥐페 총리와 시라크 대통령의 친구들은 졌고, 사회당의 친구 들은 이겼습니다(프랑스 사회당수 리오넬 조스팽).”
지난 5월1일 영국 총선의 결과가 노동당의 압승으로 끝나면서 이런 ‘변 화의 물결’이 전체 유럽으로 확산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에 대해 우선 선거를 앞두고 있는 프랑스 사회당(오는 5월25일 총선 실시)과 독일 사민당(오는 98년 실시)은 고무된 분위기다. 그동안 보수의 대명사 ‘대 처리즘’의 위세에 눌려 있던 영국에서 ‘좌파’인 노동당이 승리한 것은 어떤 형태로든 유럽 좌파의 선거승리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좌파들이 이렇게 보는 이유는 무엇보다 노동당이 예상을 뛰어넘는 대승을 거뒀다는 데 근거한다.
독일 사민당 “콜의 15년 집권 우리도 끝낸다”
이번 영국 총선 결과 노동당은 4백19석을 차지했고, 여당이던 보수당은 1 백65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이 밖에 제3당인 자유민주당은 46석을 차 지했다. 영국 정가는 이런 선거결과를 한마디로 ‘노동당 압승, 보수당 궤멸, 자유민주당 약진’으로 풀이한다. 이번 총선 결과 노동당은 지난 9 2년 총선과 비교해 1백48석을 늘린 반면, 보수당은 1백71석이 줄었기 때 문이다. 더욱이 이번 총선은 영국에서 2차대전 이후 가장 큰 의석차를 낸 선거로 기록되게 됐다.
물론 이번 선거는 ‘영국의 특수성’이 많이 반영된 것이다. 이번 선거 결과는 우선 반복지국가와 시장만능주의 노선을 고수하던 대처리즘의 18 년 장기집권에 대한 영국 국민의 염증을 반영한 것이다. 더욱이 영국 보 수당 정권은 그간 각료들의 섹스스캔들과 부패스캔들이 잇따르면서 국민 들의 기대에서 크게 멀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변화 요구’가 다른 유럽국가에서도 동일하게 존재한다는 게 유럽 좌파들의 시각이다. 특히 헬무트 콜 총리가 15년간 ‘장기집권’하고 있는 독일의 경우 영국 총선에 대한 체감인식도 가 매우 높은 실정이다. 이에 따라 독일 사민당은 오는 98년 가을 치러질 연방의회 총선에서도 영국 총선과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는 영국 총선 직후 사민당이 “73주 뒤에 우리도 한다”라는 대 형 플래카드를 중앙당사에 내건 것에서도 확인된다. 사민당은 독일사회 저변에 깔려 있는 변화에 대한 바람을 북돋우면 내년 총선에서 승산이 있 다고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오는 5월 말 선거를 앞두고 본격적인 유세에 들어간 프랑스 사회당도 영 국 총선 다음날인 지난 5월2일 ‘직업창출과 노동시간 축소’를 주내용으 로 하는 선거강령을 발표했다. 사회당이 이날 발표한 선거강령은 기존 사 회당의 정책을 반영한 것이지만, 동시에 영국 노동당의 승리로 고양된 좌 파들의 요구를 수렴한 것이기도 하다. 지난 93년 총선에서 현 중도우파연 합에 패배한 사회당이 “경제와 사회정책을 바꾸고, 프랑스인의 일상을 바꾸고, 유럽을 바꾸고, 우리의 민주주의를 바꾸자”며 ‘변화’를 주요 선거구호로 내세운 것도 영국바람을 이어가자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영국 총선 전후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프랑스 좌파는 미세한 차 이이기는 하나 우파를 앞서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노동당 정책에 사회주의는 없다
이렇게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좌파 정당들이 영국 총선이 끼칠 영향을 중 시하는 것은 독일 프랑스 총선 결과가 앞으로 형성될 유럽연합의 성격 자 체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현재 유럽에는 스웨덴·노 르웨이·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와 이탈리아에서 좌파 정권이 집권하고 있 다. 이에 영국에 이어 프랑스·독일에까지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 유럽 주 요국의 대부분을 좌파가 장악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영국 노동당 집권이 유럽 좌파에 끼칠 영향이 그리 크지 않을 것 이라는 전망 역시 만만치 않다. 유럽 좌파가 이념적 폭이 대단히 넓은데 다 이번 영국 총선에서 드러난 노동당의 정책이 ‘정통 좌파’와는 거리 가 멀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는 우선 영국 언론들의 이번 총선 해설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많은 영 국 정치평론가들은 이번 총선이 단순히 국민들의 정권교체 욕구에 의한 대세몰이의 결과라는 분석에 반대한다. 영국의 정치판 자체가 보수당의 극우논리에서 전통적인 정치구도인 중도노선으로 역사적 회귀를 했다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다. 물론 평론가들은 중도노선의 탈환이 보수당 내의 온건파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동당에 의해 이루어진 점에 주목해야 한다 고 지적한다. 또 사회주의를 지향해오던 노동당이 중도노선의 정책을 앞 세워 집권에 성공한 것은 분명 역설이지만, 이는 변화된 정세에 대한 하 나의 정치실험이라고 평가한다. 집권을 원하는 좌파정당이 대중적 지지확 보를 위해 몸부림친 하나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노동당이 선거를 의식해 ‘좌파의 원칙’마저 저버린 게 아니냐는 비판에 대해, 노동당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페이비언협회의 한 인사는 “20세 기 들어 노동당의 단독집권이 다 합해서 20년이 채 안 된다는 사실을 기 억하느냐”고 반문한다. 노동당의 선거운동을 총지휘한 피터 만델슨 의원 도 “시대적 요청에 충실하기 위해서 이념적 제약을 벗어난 실용적 중도 노선의 추구는 필연적”이라고 단언한다. 즉 좌파도 유권자들의 변화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 노동당의 이런 중도적 정책은 프랑스 우파들이 선거 결과를 ‘우파 이데올로기인 대처리즘의 승리’로 파악할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영국 총선 직후 프랑스 우파의 지도자 알랭 쥐페 총리는 “영국 노동당의 승리 는 곧 자유주의적 노동주의, 결국은 자유주의의 승리”라는 논평을 발표 했다. 국유화 정강 폐기, 자유주의 개혁 주창을 통한 중산층 끌어안기에 다 사회복지보다는 노동유연화에 비중을 두는 영국 노동당의 온건 노선에 서는 어느 곳에서도 고전적 좌파의 정치 프로그램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프랑스 언론 “궁극적인 승자는 대처” 야유
프랑스 우파는 토니 블레어 당수가 이끄는 노동당 정책이 프랑스 우파연 합의 정치 프로그램과 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좌파인 토니 블레어 영국 노동당수가 노동유연화를 말하고, 우파인 쥐페 프랑스 총리 가 사회복지 사수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아이러니라고 지적하 고 있다. 프랑스 언론들이 토니 블레어를 토리(보수당의 별명) 블레어 또 는 블링턴(블레어+클린턴)이라고 야유하는 것도 그의 정치노선이 서구 좌 파의 노선보다는 미국식 클린턴 노선에 가깝다는 판단 때문이다. 프랑스 언론은 더 나아가 이번 영국 선거의 궁극적인 승자를 토니 블레어가 아니 라 마거릿 대처라고 혹평하고 있다.
사실 이는 유럽내의 좀더 좌편향된 정치세력들의 영국 총선 분석과도 일 맥 상통한다. 이탈리아의 공산재건당은 영국 총선 뒤 “영국 국민들은 노 동당의 중도좌파적 정책에 속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지난 94년 블 레어의 당권 장악 이후 영국 노동당은 사회주의적 색채를 잃었다는 것이 다.
그러나 리오넬 조스팽 프랑스 사회당수는 “영국 노동당의 정책에는 최저 임금제 실시, 유럽사회헌장 서명, 민영화기업에 대한 세금 부과 등이 포 함돼 있으며 이는 명백히 우파와 구별되는 정책”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이어 “따라서 이번 영국 총선 결과는 유럽 사회주의의 진정한 승리”라 며 프랑스도 사회당과 함께 미래를 택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영국 총선에 대한 분석은 독일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다수 독일 언 론들도 이번 영국 총선이 사실상 정책대결의 무대였다기보다는 단순히 인 물싸움에 지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독일 언론들은 따라서 영국 노 동당의 압승이 곧바로 서유럽 사회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가 될 수 없으며, 내년에 치러질 독일 총선 결과도 섣불리 ‘변화’ 쪽으로 예측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분석하고 있다.
독일 언론들은 이 밖에 영국과 독일의 경제상황이 다른 것도 ‘변화’ 전 망을 어둡게 하는 요인의 하나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영국의 경우 그간 많은 사회적 논란에도 80년대 초반 이래 추진해온 구조조정이 마무리됨으 로써 경제가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런 경제적 안정 이 영국총선에서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많이 완화시켰다는 것이다. 반면 독일은 현재 높은 실업률을 기록하며 불황에서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독일 언론들은 이런 어려운 독일의 경제현실이 독일국민들 로 하여금 오히려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안겨줄 수도 있다고 내다보 고 있다.
사실 ‘독일 대안세력’의 현주소 역시 이런 회의적인 목소리에 힘을 보 태고 있다. 우선 야당인 사민당 내에서 토니 블레어에 필적하는 역량을 지닌 대표주자를 찾아볼 수 없다. 또 독일 사민당은 영국 노동당과는 달 리 젊은층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따라서 독일 사민당이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아직 넘어야할 벽이 많다는 것이 독일 내의 대체적 시각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장년층에 비해 매우 낮은 젊은층을 끌 어들일 ‘개혁 프로그램’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새 노동당’의 실험은 이제부터
유럽 정치판에 이런 다양한 논쟁을 불러온 토니 블레어 영국 노동당수는 자기 자신을 ‘급진적 중도’라고 규정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철학자 존 맥머레이의 영향을 받은 그는 “개인의 권리와 책임이 사회 속에서 조화 롭게 꽃피는 사회를 이상으로 여긴다”는 것을 정치철학으로 삼고 있다. 그는 이런 철학적 바탕을 기초로 노동당의 정책을 바꾸어 ‘새노동당’을 만들어냈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렇게 변화된 ‘새노동당의 승리’에 대해 유럽 정계가 다양한 해석을 내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 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영국 노동당은 기존의 지지기반을 그대로 유 지하면서 중산층까지를 포괄하는 정책들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이는 노 동당에 대한 우경화 비판 속에서도 지난 2월 영국 노총(TUC)이 변함없는 노동당 지지를 밝힌 데서도 드러난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프랑스와 독일 등에서도 영국의 ‘변화’가 이어질지 에 대한 전망은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결국 이들 나라의 좌파가 ‘사회주의 전통’과 ‘변화 욕구’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조화시키는가에 따라 선거결과는 달라질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어떤 것이 사회주의 전 통을 지키며 변화 욕구를 수용하는 것인지에 대한 대답은 아직 미완으로 남아 있다.
런던=권은정 브레멘=최우성 파리=최연구 통신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