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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05월15일 제 157호 한겨레21

재계“또 얼마나 뜯겨야 하는가”

(사진/`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를 청산할 것인가. 96년 1월 청와대에서 열린 재벌회장단 초청 만찬.)

 “웬 놈의 용(龍)이 그리 많은가? 그 많은 대선주자들의 사조직 운영비 는 도대체 어디서 나는 돈인가. 이런 경제난 속에서 1조원 이상씩 천문학 적 돈이 들어가는 선거를 다시 한번 치르면 경제는 거덜날 수밖에 없다. ”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국내 재벌그룹 한 임원의 말에선 대선을 앞둔 재계 의 공포감이 물씬 묻어난다.


왜 회장님은 외국에 나가실까

92년 대선자금을 둘러싸고 정치권의 공방이 벌어지는 것도 재계로서는 가 시방석이다. 여야간의 진흙탕 싸움 속에서 언제 어떤 식으로 불똥이 튈지 모르는 일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국내의 내로라 하는 재벌그룹 총수들 30여명이 굴비 엮이듯 검찰에 소환된 것이 불과 1년 반 전 일이다.

얼마 안 있으면 총수들의 외국행이 각 그룹별로 러시를 이룰 것이다. 선 거철이 되면 몇달 전부터 각 그룹 회장실마다 `‘외유중’이라는 팻말이 걸리는 현상은 이제 당연하게 여길 정도로 낯익은 일이 됐다. “일종의 도피다. 외국에 나간다고 정치자금을 안 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귀찮은 일은 적어지지 않겠는가.” 또다른 재벌그룹 임원의 어조는 자조적이기까 지 하다.

“이미 대선주자 캠프별로 입질이 시작되고 있다. 보험을 들라든지, 현안 사업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을 내세워 기업들에 은근히 손을 내밀고 있는 것으로 안다.” 한 재벌그룹 실세로 알려진 임원의 귀 띔이다. “신한국당 7룡(龍)을 출신고별로 보면 경기고 3명, 경복고 3명, 서울고 1명이다. 요즘 대기업에 근무하거나 사업을 하는 동문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어느 동문을 밀어주느냐가 최대 화젯거리다.” 대선주자들의 물밑 움직임이 그만큼 활발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힘들어 죽겠다. 손을 내미는 곳이 너무 많다. 답답한 마음뿐이다.” 대기업 한 임원은 다짜고 짜 하소연부터 한다. 한 경제단체장은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서는 하루 에 10여 군데서 전화가 왔다”고 전했다.

대기업 관계자들은 정치권의 입질시점이 이번 대선에서는 예전보다 좀 늦 은 편이라고 말한다. 92년 대선 때는 선거 1년 전부터 시동이 걸렸다. 한 보사태가 터진 데다 여권의 대선주자간에 교통정리가 늦어지고 있기 때문 이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대선을 앞두고 흔히 나도는 재계의 줄서기를 둘 러싼 수군거림도 별로 없다.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 진영에 출신인사들이 다수 영입된 삼성그룹 이야기가 약간 나오고 있지만 정작 당사자는 “말 도 안 된다”며 펄쩍 뛰고 있다.

“지금은 대선 예비주자들이 지연과 학연 등 각종 연(緣)을 이용해 대기 업들과 핫라인을 개설하는 시기라고 보면 된다. 핫라인이 본격 가동돼 대 선자금이 실제 오고가는 것은 여야 대선후보가 다 결정되고 투표일이 3~4 개월 정도 앞으로 다가왔을 때다.” 대기업 회장실에 근무하는 한 임원의 설명이다. 후보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한 현 시점에서 기업들이 뭉칫돈을 내놓을 이유가 없고 위험부담도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는 좀 색다른 양상도 나타나고 있다는 후문이다. 요 즘 여권의 대선주자 캠프들이 제각각 “차기대권을 누가 잡더라도 권력을 대통령 한 사람이 독식할 수는 없다. 권력분산이 불가피하다. 이번 대선 에서 대통령이 안 되더라도 우리에게 낸 보험료가 그냥 날아가 버리는 것 은 아니다. 차차기 도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며 기업들을 설득하고 있 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권력 분점의 전망을 앞세워 한마디로 선투자(先投 資) 하라는 유혹인 것이다.


대선주자 사무실 운영비도 ‘기업 부담’

대선주자들이 공식, 비공식적으로 운영하는 사무실 운영비는 대선자금에 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만 기업들 부담이기는 마찬가지다. “대선주자별 로 서너개씩 운영하고 있는 사무실 운영비는 중간 보스들이 조달한다. 본 격적인 대선자금은 그룹 총수와 대선후보 진영간의 담판을 통해 한두 차 례에 걸쳐 거액이 전달된다. 한개 사무실 운영비가 월수천만원 정도 들겠 지만 이 정도는 중간 보스들이 스스로 책임지는 것으로 안다. 정작 선거 에 임박해 오고가는 뭉칫돈과 비교하면 코끼리 비스켓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지만 그 돈이 결국 어디서 나오겠는가.”


‘전과자’ 낙인 찍는 부메랑될 수도

“전에는 기업들이 겉으로는 죽는 소리를 해도 속으로는 정치자금을 마련 하는 데 큰 무리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난해 이후 계속된 경기불황 으로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공 소장의 말이다. 지난해 상장기업들의 평균 매출액 순이익률(매출액 대비 순이익 비율)은 0.7%로 95년의 3.1%에 서 곤두박칠쳤다. 반면 매출액 대비 기부금과 접대비는 각각 0.23%와 0.1 3%. 결국 1천원짜리 물건을 팔아 7원의 순이익을 남겼고 다른 한편으로 3 .6원을 기부금과 접대비로 쓴 것이다. 각종 협회비 등 제세 공과금까지 합치면 기업의 준조세 부담은 훨씬 높아진다. 더욱이 이런 수치에는 비공 식적으로 지출된 정치자금 등 `‘검은돈’은 빠져 있다.

정치자금은 그만큼 투자 등 다른 기업활동에 쓸 수 있는 돈이 외부로 빠 져 나가는 결과를 낳는다. 나라 전체로는 경제회복이 늦어지는 것이다. 다음 정권에서 정치자금은 준 사람이 언제 어떻게 처벌받을지 모른다는 ` ‘부메랑’에 대한 공포감도 크다.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삼 성, 대우, 동아, 대림, 진로, 동부, 한양, 한보 등 30대 그룹 총수 8명들 은 `‘전과자’ 낙인이 찍히는 수모를 겪었다. 한 그룹총수는 `사형선고 를 받았다. ‘곧 망명할 계획이다’는 외국 언론의 보도로 해외사업에 큰 타격을 입는 등 곤욕을 치르기까지 했다. “김영삼 정부는 전직 대통령도 처벌할 수 있다는 전례를 남겼다. 정권이 바뀐 뒤 상황이 바뀌면 얼마든 지 다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지난번에는 집행유예로 끝났지만 이제 한번 만 더 걸리면 실형이 불가피하다. 관행이라고 그대로 넘어가기는 어려운 상황이 됐다.” 노씨 비자금 사건 때 총수가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한 그 룹 임원의 말이다.

경제학자들은 경제난과 처벌 위험성보다도 경제의 룰이 깨지는 것을 대선 자금의 최대 폐해로 꼽는다. 기업들이 대선자금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불 법적 수단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해야 한다. “그룹 차원에서 대선자금 제 공액이 결정되면 각 계열사별로 할당이 된다. 계열기업들이 비자금을 조 성하는 가장 일반적 방법은 노무비나 자재비, 하도급 공사비 등을 뻥뛰기 하거나 가공으로 꾸며 그 차액을 챙기는 것이다.” 한 재벌그룹 임원의 설명이다. 비자금 조성을 위한 기업의 불법행위를 세무당국이 놓칠 리 없 다. 이 약점은 다시 정치권이 정치자금을 요구하는 수단으로 악용된다. 악순환이다. 5공 초 국제그룹이 해체의 비극을 맞은 데는 부실경영과 함 께 정치자금을 제대로 갖다바치지 않은 데 대한 괘씸죄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베팅’을 위한 대선자금 제공

그러나 단순한 정치자금 제공 차원을 떠나 반대급부를 노리고 대선자금을 제공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부 발주공사 수주나 신규사업 허가, 방위 산업 관련 수주 같은 큰 이권을 챙기려는 것이다. 재계에서는 이를 `‘베 팅’한다고 표현한다. 정경유착의 폐해가 가장 큰 부분이다. 노씨 비자금 사건 때 재벌그룹들은 해군잠수함기지 건설공사, 차세대 전투기사업, 상 용차 사업인가, 원전 발주 등 각종 이권을 노리고 정치자금을 제공한 사 실이 드러났다. “기업이 제품 경쟁력을 높이는 노력은 뒷전으로 밀리고 한탕주의가 판을 치게 된다. 돈을 갖다 준 기업을 위해 정부의 정책방향 이 일관성을 잃고 오락가락한다. 경제의 질서가 깨지는 것이다. 국민들도 돈 있는 사람을 우습게 볼 수밖에 없다. 성실한 땀의 대가로 얻은 부가 존경받는 윤리적 기반이 무너지는데 자본주의가 잘 될 리 없다.” 이한구 대우경제연구소 소장의 개탄이다.

정치자금을 지렛대로 금융특혜를 받아 급성장했다가 `‘모래성’처럼 무 너진 한보는 대표적 사례다. 한보는 결국 국가경제에 5조원이 넘는 천문 학적 규모의 부실을 안겨 주었다. 재계에서는 삼성 승용차사업 진출 허용 도 마찬가지 경우로 꼽는다. 92년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 후보진영에 줄은 댄 기업들을 가리켜 `‘1S 2H 2L’이라는 용어가 회자되기도 했다. 이들 기업은 물론 강력하게 부인했지만 YS정권 하에서 여러 혜택을 본 것은 부 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재벌그룹은 아니지만 중견기업들이 대선자금을 갖다바친 대가로 지역민방, 고속도로 휴게소, 민자역사 등의 사업권을 따 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국적 현실에서 대선자금을 포함한 정치자금 제공이 사라지기를 기대하 는 것에 회의적인 재계 관계자들이 적지 않은 것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선자금을 포함한 정치자금은 기업들에게는 자릿세와 베팅의 성격을 함께 띠고 있다. 특별히 이권을 챙길 생각이 없더라도 정 치자금을 안 갖다 주고서는 기업활동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다.” 대그룹 한 임원은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이나 시민단체에서 벌어지는 정치개혁 운 동에 큰 기대를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정보제공은 매력적인 선물

재계나 학계에서는 돈 안 쓰는 정치와 선거를 위한 법개정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관치경제의 틀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한다. “좀더 근본적인 규제완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제도와 관행이 지속 되는 한 기업들은 정치권이나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정부정책이 나 기업회계 같은 각종 정보도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투명해져야 한다 . 또 각종 이권이 개입할 수 없도록 경쟁원칙을 철저히 적용하는 것도 중 요하다.” 이한구 소장의 진단이다.

곽정수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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