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특집 > 이슈추적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6년01월18일 제594호
박정희가 사인한 ‘유신에 대한 맹세’

[이슈추적_ 국기에 대한 맹세]

‘국기에 대한 맹세’의 대통령 개입 증명하는 1972년 8월9일 청와대 보고서 확인…10월 유신 앞둔 애국주의 운동 물결 한가운데에서 전국 각급 학교에 지침 하달

1968년, 국기에 대한 맹세는 충남의 학교에서만 불리고 있었다. 충남 도교육위원회가 자체 시행한 맹세문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위하여 정의와 진실로써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그나마 ‘정의와 진실’이라는 조건을 ‘충성’ 앞에 닮으로써, 개인의 도덕적 판단을 존중하고 있었다. 대부분 공립학교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시행하고 있는 미국의 국기에 대한 맹세를 봐도, ‘자유와 정의’라는 전제가 붙어 있다.

4년 뒤인 1972년, 문교부가 국기에 대한 맹세를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했다. ‘정의와 진실’은 빠지고 ‘몸과 마음을 바친’ 충성만이 남았다. 그동안 문교부가 국기에 대한 맹세를 확대 시행한 과정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맹세문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제정됐으며, 어떤 검증 과정을 거쳤으며, 최종 결재자는 누구였는지에 대해서 국가 상징 담당 부서인 행정자치부조차 알지 못했다. <한겨레21>은 1972년 국기에 대한 맹세 제정 과정을 추적했다. 편집자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박정희는 그 시대의 아버지였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가부장이 하사한 ‘충성 주문’이었다. 박정희는 국기에 대한 맹세가 전국으로 퍼져나간 1970년대 초 나라 사랑을 고취하는 각종 행사와 사업을 꼼꼼히 챙겼다. 국기에 대한 맹세도 박정희의 ‘예스’ 사인을 받았다.

<한겨레21>의 취재 결과, 맹세문구 작성 과정에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국무총리, 민관식 문교부 장관 등 1972년 군사정권의 정점에 선 인사들이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맹세문은 민관식 문교부 장관의 지시로 문교부에서 국어과 담당 장학관으로 일하는 이명권(77)씨가 만들었으며, 김종필 총리가 두 가지 후보 문안 가운데 하나인 현재의 맹세문을 ‘간택’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맹세문은 문교부가 각급 학교에 시행 지시를 내렸던 1972년 8월9일 청와대에도 보고돼, 박정희가 보고서에 직접 결재 사인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 박정희는 그 시대 '국가의 아버지'였다. 그가 성역화한 아산 현충사 옆에는 학생 시설인 충무수련원이 있었고, 국기에 대한 맹세도 이와 함께 탄생했다. 박정희가 현충사를 방문한 모습. (사진/ 정부기록사진집)

13쪽 분량 ‘국기에 대한 맹세 실시’

“민관식 장관이 국기에 대한 존엄성과 애국심을 기르기 위해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만들라고 시켰지요. 미국의 맹세문과 문교부 편수국에서 수집한 여러 자료를 참고로 하룻밤을 새워 두 가지 후보 문안을 만들었습니다.”

맹세문을 작성한 이명권 전 장학관의 증언이다. 그는 이튿날 두 가지 후보 문안을 민 장관에게 보여줬고, 민 장관은 이를 김종필 총리에게 가져갔다. 김 총리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했고, 이같은 사항은 일사천리로 청와대에 보고됐다.

취재진이 국가기록원 소장 문서를 검색한 결과, ‘국기에 대한 맹세 실시’(문교부·1972년 8월9일)라는 제목의 대통령 보고서를 찾을 수 있었다. 대통령 비서실이 작성한 13쪽짜리 보고서는 새로 제정한 맹세문과 함께 문교부의 시행 계획이 첨부돼 있었다. 첫째 장은 다음과 같았다.

“1. 문교부에서는 ‘국기에 대한 맹서’를 정하여 각급 학교에서 교육, 실천케 함으로써 국민의례 시는 물론, 평소 국기의 존엄성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철저히 다짐하여 애국 애족하는 국민정신을 함양시키기 위하여, ‘국기에 대한 맹서’를 교육, 실시하고자 함을 보고하여 왔습니다. 2. 이 맹서는 광복절 행사부터 실시할 예정입니다. 맹서문-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보고서는 맹세문이 ‘국민교육헌장 이념 구현의 일환’이라는 점도 명시했다. 또한 초·중·고·대학생들에게 암기시켜 ‘항구적으로 생활화’시키겠다는 목표도 보고했다. 보고서 오른쪽 상단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날카로운 사인이 보였다.

당시 국기에 대한 맹세는 전 국민적 차원에서 시행된 게 아니었다. 시행 주체는 총무처가 아니라 문교부였다. 시행 지침도 문교부 공문서인 장학 지시(문교부 장학 1011-688)로 각 학교에 내려졌다. 장학 문서는 교육 지침을 내리는 데 사용하는 공문서다. 그런데 일개 장학 문서가 왜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됐을까?

박정희가 3선 개헌을 강행하고,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인 김대중 후보를 간신히 이기던 1970년대 초반은 국가 상징물을 동원한 ‘애국주의 운동’이 한창인 무렵이었다. 1972년 10월 유신을 앞둔 때였다. 박정희는 이때 각 부문에서 벌어지는 애국주의 운동을 꼼꼼히 챙기며, 때론 진두지휘했다.

충무수련원 관련 보고 4건을 직접 챙기다

‘박정희 가부장 체제’의 모범생은 충남 도교육위원회였다. 1968년 충남 도교위는 박정희가 존경하는 이순신을 모델로 ‘충무정신 함양’을 교육 지표로 내세운다. 또한 그 일환으로 국기에 대한 맹세를 최초로 만들어 시행하는 한편, 박정희가 성역화한 아산 현충사 옆에 학생 입소 수련시설인 충무수련원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박 대통령은 1971년 충남도청에서 이같은 계획을 보고받고 흡족해한다. 그리고 충무정신 교육의 전국적 확대를 지시한다. 문교부는 곧바로 장학 자료를 내어 애국심 고취 교육의 모범사례로 충남 도교위를 소개하고, 각 학교에 충무정신 교육을 지시했다.

취재진이 국가기록원 소장자료를 찾아본 결과, 박정희가 일개 도교육청이 짓는 충무수련원과 관련해 모두 4건의 보고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건축 외형은 고대 한옥 양식을 도입했고… 각하께서 재가하시면, 곧 착공하여 내년 충무공 탄신 기념일 이전에 완공, 개관할 예정입니다.”(충무수련원 신축조감도 보고, 1972년 4월28일)


△ 취재진이 찾은 '국기에 대한 맹세 실시' 대통령 보고서에는, 박정희의 사인이 오롯이 남아 있었다.

1972년 5월2일 문서에는 박정희가 결재 사인 옆에 “제1후보지가 적당할 듯함”이라고 써놓고, 건물 구조에 의견을 밝힌 뒤 조감도를 그려오라는 ‘친필 지시’까지 볼 수 있다. 1976년 6월24일에는 충무수련원에 입소하는 학생들의 교육 프로그램까지 챙기는 지경까지 이른다. ‘충무수련원 및 화랑교육원 고교학생 수련개선 방안’ 보고서에는 수련 일정을 3박4일에서 4박5일로 늘리고 유신이념 교육을 추가하고 새마을·반공영화 상영을 하겠다는 등 구체적인 교육 내용까지 보고돼 있다. 1972년 4월22일에는 비서실로부터 ‘국기 및 국기함 기증 상황’ 보고가 올라온다. 박 대통령은 바른국기보급회 등이 기증한 국기 및 국기함 1만 개를 낙도 주민에게 하사하도록 건의한 것에 대해 ‘친필 사인’으로 허락한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파악된다. 유신을 앞둔 정치 논리가 코흘리개 학생에까지 충무정신 교육을 통해, 국기 사랑을 통해, 국기 맹세를 통해 미친 것이다. 20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한 이치석씨는 그의 책 <전쟁과 학교>에서 “아이들을 미래의 국가주의 병사로 만들던 시기”라고 평가했다.

‘자발적 충성’을 강요하는 박정희 체제에서 제정된 국기에 대한 맹세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광연 도덕교사모임 대표는 “학교의 도덕 교과서에서 단 한 번도 애국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지 않듯이, 아무도 국기에 대한 맹세에 대해 질문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문가의 고증이나 의견 수렴도 없이 유신 체제 고위 정치인의 의지와 간택으로 결정된 국기에 대한 맹세. 애국을 방패 삼아 성역으로 존재해왔던 것이다.


‘선창 따라하기’에서 ‘암기 묵송’으로

표석 세우고 교과서 앞장 장식케 한 ‘국기에 대한 맹세 실시 계획’

문교부가 작성해 대통령 보고서에 첨부한 ‘국기에 대한 맹세 실시계획’ 문서를 보면, 당시 맹세문의 제정 목적과 배경이 드러난다.

이 문서는 “(맹세가) 국민교육헌장 이념 구현의 일환으로서, 각급 학교의 교육과정에 반영하여 지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맹세는 학생뿐만 아니라 교사도 솔선수범하도록 했다. 1972년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계몽 및 암송 단계’에는 학생·교직원이 맹세의 뜻을 이해하고 완전 암기하도록 했다. 행사 때에는 대표 학생의 선창에 따라 전원 제창한다. 1973년 3월부터 시작되는 ‘묵송 단계’는 선창 없이 전원 암기해 묵송하는 단계다. 문서는 각 학교에 “맹세는 정숙한 자세로 정확하게 암송할 것이며, 마음과 암송이 일치되도록 지도”하라고 지시했다. 이와 함께 각 학교의 국기 게양대 아래에 맹세문을 담은 표석을 세우도록 했다.

현재 초·중·고 도덕 교과서 앞장에 박힌 국기에 대한 맹세문도 이 문서의 계획에 따른 것이다. 문서는 “초·중·고 교과서 및 문교부 발행 각종 도서의 속표지 다음에 국기와, 그 밑에 맹세를 등재한다”고 써놓았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4년 뒤인 1976년부터 교과서에 등장한다. 이 문서는 1972년 8월9일 대통령 보고서와 함께 첨부돼 박정희의 ‘예스’ 사인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