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특집 > 이슈추적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6년01월18일 제594호
“난 순수하게 썼는데 유신이 이용”

[이슈추적_ 국기에 대한 맹세]

1972년 하루만에 전국용 ‘국기에 대한 맹세문’ 만든 이명권 전 문교부 장학관
박정희 오른팔 민관식 전 문교부 장관 지시, 최종결정은 김종필 전 총리

▣ 글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현재 시행되고 있는 ‘국기에 대한 맹세’의 문구 작성 과정에 유신 관료가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겨레21>의 취재 결과, 1972년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와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국기에 대한 맹세를 제정하는 데 주요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맹세문은 전문가의 철저한 고증이나 의견 수렴 없이 일개 교육 관료와 ‘의지’와 정치인의 ‘간택’으로 결정된 것으로 밝혀졌다.

<한겨레21>은 1972년 현재의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작성한 이명권(77)씨를 만나 이같은 사실을 들었다. 이씨는 지난 1월11일 취재진을 만나 “당시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맹세문을 지어오라고 해서 하룻밤 사이에 만들었다”며 “김종필 총리가 후보 문안 가운데 최종안을 선택해 그날 바로 각급 학교에 시행 지시를 내렸다”고 증언했다. 이씨는 1966년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로 일하다가, 1972년 문교부 장학실의 국어과 담당 장학관으로 일하며 맹세문을 만들었다.

박정희 연설문 작성했던 경력으로 인해…

국기에 대한 맹세를 어떻게 만들게 됐나.


△ 이명권씨는 교육자적 양심에 따라 순수하게 맹세문을 지었다고 말했다. (사진/ 박승화 기자)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어느 날 불러 “국기에 대한 존엄성과 애국심을 기르기 위해 국기에 대한 맹세를 지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걸 한번 전국적으로 시행해보자”고 말했다. 그러면서 맹세문을 만들어보라고 했다.

맹세문을 만드는 데 얼마나 걸렸는가.

=하루 걸렸다. 민 장관의 말을 듣고 퇴근한 뒤 집에서 밥 먹으면서 생각했다. ‘길면 안 되고,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지어야겠구나’라고. 밤을 새다시피 연구해 제1안과 제2안이 실린 후보 문안을 만들어 이튿날 아침 장관실로 가져갔다. 민 장관이 마침 중앙청에 간다며 그걸 가지고 가더라. 당시 중앙청에는 김종필 국무총리가 있었다. 근데 그걸 가지고 가서 김 총리에게 보여준 모양이더라. 민 장관이 다시 나에게 와서, 내가 준 후보 문안을 보여줬는데, 제1안에는 파란 볼펜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고 “거의 완벽한 글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 옆에는 김종필 총리의 사인이 있었다.

각급 학교에 지침은 어떻게 내렸나? 행정자치부 자료를 보면, 현 국기에 대한 맹세는 1972년 8월9일 ‘문교부 장학 1011-688’이 각급 학교에 시달돼 전국적으로 시행됐다고 나와 있다.

=그걸 보여주더니 민 장관이 총리가 이렇게 지시한 사항이라면서, 조속히 시행 처리를 하라고 했다. 그래서 허겁지겁 장학 지시를 내렸다. 아마 그 문서일 것이다. 이틀 만에 벌어진 일이다.

맹세문을 만드는 데 전문가의 도움은 없었나? 이를테면 대학 연구진이라든가.

=민 장관이 참고 자료를 줬다. 영문으로 된 미국의 국기에 대한 맹세문과 문교부 편수국에서 모은 여러 자료들을 준 것 같다. 이것들을 참고로 독자적으로 만들었다.

당시에는 충남과 전남에서 자체적으로 국기에 대한 맹세를 시행하고 있었다. 현 맹세문은 충남 맹세문과 문장 구조가 같고 몇몇 단어만 다르다.

=지방 것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하튼 여러 자료를 봤다. 하지만 내가 독자적으로 만들었다.

민 장관과 김 총리가 봤다던 두 가지 후보 문안 중 채택되지 않은 나머지 하나는 어떤 내용이었나.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예전엔 자료를 챙겨뒀는데, 이사하다가 잃어버린 것 같다.


△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 말부터 국가 상징물을 동원한 애국주의 운동을 벌였다. 국기에 대한 맹세도 그 가운데 하나다. 1972년 10월 영속적 지배체제인 유신을 선포하는 모습. (사진/ 보도사진연감)

국기에 대한 맹세를 어떻게 일개 장학관이 만드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말하고 싶지 않지만, 196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의 스피치 라이터(연설문 작성자)로 2년 동안 일했다. 서울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경기공업전문대학(현 서울산업대) 국어 교수로 있을 때, 청와대에 있는 지인의 부탁으로 몇 번 하다가, 아예 청와대 대변인 아래로 들어갔다. 그런 걸 거부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평소에는 박 대통령의 연설 문집이나 기타 발언록을 읽으며 그의 사상과 생각을 이해해야 했다. 대통령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항상 그게 고민이었다. 강박관념도 컸다. 그때는 무서운 시절 아니었나. 하기 싫어도 윗사람 눈치를 봐야 했던 때다. 제발 내보내달라고 부탁해 문교부 장학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청와대에서의 경력이 있어선지, 민 장관이 각종 연설문과 문안 작성을 나에게 시켰다. 그래서 나는 국·실장이나 드나들던 장관실을 자유롭게 들락거렸다. 남들이 나를 ‘공보 장학관’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까. 민 장관은 당시 박정희의 오른팔이었다. 그 사람에게 함부로 못할 때였지. 야당 생활을 하다가 박정희 정권에 들어왔으니까. 민 장관은 우리와 다른 ‘정치인’이었고, 수가 다양한 사람이다.

“난 보수적 관료주의에 대항했다"

맹세 문구가 너무 강압적이지 않은가?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한다는 어구는 ‘무조건적 애국’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 국기에 대한 맹세가 전국 학교에서 시행된 데에는 박정희 정권 고위관료들의 의지가 있었다. 1972년 당시 국무총리를 맡았던 김종필씨의 역할도 컸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나는 순수한 교육자적 양심에 따라 만들었다. 순수한 뜻으로 국가에 충성하라고 했다. 정권에 충성한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정반대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독재 정권이 그걸 이용했을 뿐이다. 박정희가 결과적으로 덕을 봤지. 내 삶을 보라. 나는 보수적 관료주의에 대항했다. 남들이 나보고 국기에 대한 맹세도 지었는데, 장관직 하나 못했다고 그런다. 노산 이은상 선생과도 교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박정희에 대해 좋게 말해도 나는 그 당시 “아니오”라고 그랬다. 난 군사독재와 유신의 분위기가 너무 싫었다. 그래서 청와대에서도 나온 거고, 결국 문교부에서도 나와 학교장 생활을 한 것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있는데.

=그 자체로 따지면 국기에 대한 맹세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걸 이용한 사람들이 나쁜 거지. 경부고속도로(애국의 길)가 있다면, 그걸 계속 달려야지. 예전에 유시민 열린우리당 의원이 뭐라고 그랬는데, 그릇을 좀더 크게 가져야 한다(유 의원은 2003년 “국기에 대한 맹세가 파시즘의 잔재”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선생님 본뜻 살면 좋겠습니다"

<한겨레21> 보고 충남 맹세문 저자 유종선씨에게 띄운 제자의 편지


△ (사진/ 남종영 기자)

국기에 대한 맹세는 1968년 충남 도교육위원회에서 시행된 것이 처음이었다. 그 뒤 문교부도 1972년 국기에 대한 맹세를 제정해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했다. 현재 전국 학교에서 암송되고 있는 1972년 맹세문은 1968년의 그것과 달랐다. ‘정의와 진실로써’ 충성한다는 애초의 충남 맹세문과는 달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한다는 내용이었다. 애초 충남 맹세문을 만든 유종선씨는 이를 “전체주의적”이라고 지적했다 (<한겨레21> 592호 참고). 유씨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유씨의 제자인 남궁명(53)씨가 편지를 보내왔다.

은사님, 안녕하셨습니까?

직접 찾아뵙지 못하고 공개적인 지면을 통하여 은사님께 글을 올림에 죄송할 따름입니다. 선생님은 제가 고등학생일 때 교장 선생님으로 계셨습니다. 당시 선생님은 훤칠한 키에 늘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모습이셨습니다. 선생님께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처음 만드셨다는 <한겨레21>의 기사를 보며 반가움과 더불어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위에서 시켜 만드셨다는 처음의 국기에 대한 맹세는 ‘조국의 통일과 번영’ ‘정의와 진실’이 들어가면서 자율적으로 깨닫고 터득하는 뜻이 담겨 있는 반면에 문교부가 몇 년 뒤 내놓은 맹세문은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라는 타율적이고도 강압적인 암시의 세뇌 교육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월요일 아침이면 초등학교에서 ‘애국조회’라는 이름으로 국민의례 때 울려퍼지고 학급회의나 각종 행사에도 낭송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지적하셨듯이 ‘전체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입니다. 아무 힘없는 아이들이 그저 맹목적으로 따라하고 있습니다. 교사들도 아무런 저항 없이 따르고 아이들까지 다그칩니다. “따지면 서로 피곤하고 괴로우니 참고 지내자” 이런 식일 겁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인’(認)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나 봅니다. 그러나 문제점을 인식하기 시작했음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다는 뜻도 있을 겁니다. 선생님의 본뜻에 어긋나지 않는 결과가 나왔으면 합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공주농고 제35회 졸업생 남궁명 올림



“서울시청 앞 지나가다 생각”

‘맹세문 작성’지시한 민관식 전 문교부장관… 김종필 전 총리는 “기억 안 나”


△ 민관식 전 문교부 장관은 재임 당시 이뤄진 '국가에 대한 맹세' 제정에 대해 "지금도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만드는 데 당시 고위 인사들은 어떤 역할을 했고, 문교부 내외의 분위기는 어떠했을까.

민관식(87) 전 문교부 장관은 1월9일 전화 인터뷰에서 “내가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제정했고 지금도 감개무량하다”고 밝혔다. 민 장관은 “장관 시절 서울시청 앞을 지나가는데, 5시 국기배례(국민의례)가 있는데도 경례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미국 사람들은 국기 경례를 철저히 하고 맹세도 하는데. 그래서 우리도 맹세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시했다”고 말했다. 맹세 문구에 대해 그는 “문교부 편수국과 글 잘 쓰는 사람들에게 만들라고 시켰고, 내 생각도 들어갔다”고 밝혔지만, 이명권 장학관은 기억하지 못했다. 김종필 전 총리의 역할에 대해 “김 전 총리에게도 보여준 것 같다. (문교부 자체적으로 시행하는 것이니까) 단지 이런 걸 한다고 보고하는 정도였던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러나 두 가지의 최종 문안이 있었는지에 대해선 “오래된 일이라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민 장관은 3·4·5대 국회의원을 무소속과 민주당 소속으로 지내다가, 군사정부 때 말을 갈아타 공화당에서 6·10대 의원과 국회의장 대리를 지냈다. 이후 1980년대엔 서울올림픽조직위 위원,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명예회장 등을 지냈고, 현재 한나라당 상임고문과 대한체육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이명권씨의 상관이었던 김판영 당시 문교부 장학실장은 “그때는 국민을 만들자는 ‘국민형성’(nation building)이 마치 교육계의 유행어처럼 대세이던 시절이었다”며 “제 나라부터 무장해야만 어지러운 세계 질서 속에서 생존할 수 있다고 믿었고, 교육계에서 맹세문 제정에 큰 반대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민관식 장관이 국기에 대한 맹세 제정을 지시했고, 이명권 장학관이 직접 문안을 지었다”고 증언했다.

김종필(80) 전 총리는 인터뷰를 거절했다. 대신 김 전 총리의 측근인 김상윤 특보는 “김 전 총리는 국기 맹세에 대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밝혀왔다. 그러나 김 전 총리는 불과 2년 전인 2003년 11월18일 자민련 중앙강당에서 열린 ‘제17대 총선대책 특별위원회’ 출범식에서 국기 맹세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오늘 여러분들이 태극기 앞에서 몸과 마음을 바쳐 조국에 충성을 다짐하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는데, 그러한 충성스런 마음이 자기 위치에서 과연 조국에 얼마만큼 충성을 다하고 있는지 우리 국민 모두는 반성해야 합니다. 본인이 1971년(1972년을 착각한 듯하다) 총리 재직 때 국기에 대한 경례를 제정했는데, 일부 반론이 있었지만 조국에 대한 충성 맹세는 필요하다고 생각해 제정했습니다.” 이에 대해 김 특보는 “김 전 총리는 자신의 과거사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한 분”이라며 전화를 끊었다. 김 전 총리는 불과 2년 만에 ‘자랑스런 추억’을 잊어버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