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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1997년05월10일 제 1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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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밝고 건강하게 자라나야 할 어린 새싹들마저도 약물중독의 유혹이 뻗치고 있다. 사진은 영화 `나쁜영화'의 한장면. 청소년 흡연과 본드 흡입을 그리고 있다.)
“언니 오빠들도 담배 피우고 어른들도 다 술·담배 하잖아요. 근데 우리 라고 하면 안되나요?”
서울 마포구 한 주택가 놀이터. 이미 자정을 넘어 새벽 1시가 가까운 시 간. 힙합 바지와 어깨끈이 달리고 무릎이 드러날 정도로 짧은 원피스를 입은 앳된 소녀 2명이 놀이터 구석 벤치에 앉아 제법 그럴 듯한 몸짓으로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알고 지내는 중학생 오빠들과 함께 근처 공 터에서 맥주와 소주를 나눠 마시다 왔다”는 이들은 초등학교 6학년. 한 여학생은 술을 많이 마셔 속이 거북한 듯 연신 배를 쓸어내렸다.
초등학생 절반 가량이 음주 경험
밝고 건강하게 자라나야 할 어린 새싹들이 술과 담배 등 각종 약물로 시 들어 가고 있다. 초등학교는 더이상 술과 담배 등 각종 약물의 안전지대 가 아니다. 지난해 문화체육부와 한국청소년학회가 전국의 9∼24세 1만3 천6백여명을 상대로 한 조사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조사결과를 보면 초 등학교 6학년까지의 음주경험은 46.6%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남자어린이 의 경험률은 57%로 절반 이상이 술을 마셔본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다. 지 난달에도 술을 마셨다는 응답은 5.1%. 상습적으로 술을 마신다는 얘기다. 담배의 경우 9.6%가 피워본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다.
술과 담배를 처음 시작한 연령도 점차 낮아지고 있다. 덕성여대 김준호 교수가 지난해 남녀 중고생 1천5백여명을 상대로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술·담배를 할 줄 아는 고교생 7백92명 가운데 1백41명(17.8%)이, 중학생 은 3백91명 가운데 1백76명(45%)이 이미 초등학교 때 술과 담배를 접했다 고 말했다. 문체부 조사결과도 10세 이전에 약물을 사용한 청소년이 술의 경우 18%, 담배는 13.7%, 본드는 16.7%, 가스는 12%로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가 술과 담배에 상당히 너그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 는 것도 한 원인이다. 우리나라의 흡연율과 술소비량은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른다. 중·고교생들의 흡연은 사실상 단속을 포기할 정도로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술과 담배는 대표적인 습관성 약물이라고 지적한다. 술로 사용되는 에틸알코올은 본드나 가스와 같은 중추신경 억제작용을 한 다. 담배 속의 니코틴은 히로뽕과 같은 중추신경흥분제에 속한다. 담배 한개비에 들어 있는 니코틴의 양은 1∼2㎎이며, 담배 한갑에 들어있는 니 코틴의 양은 20∼40㎎이다. 이 정도의 니코틴양은 히로뽕이나 코카인 등 중추신경흥분제의 2회 사용량에 맞먹는다. 미국은 이미 담배를 마약으로 규정했다.
문제는 술과 담배 그 자체에 그치지 않는다. 술과 담배는 아이들을 또다 른 약물의 구렁텅이로 이끄는 미끼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문체부의 조사 에 따르면 본드와 가스를 마셔본 경험이 있는 초등학생 어린이는 각각 1. 5%, 2.2%로 나타났다. 또 각성제를 복용한 경험이 있는 초등학생은 2.2% 이다.
엄마손에 이끌려 약물남용상담실을 찾은 김아무개(10)군. “초등학교 들 어가기 전에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셔봤어요. 그러다가 1학년 때 동네형 들과 함께 본드를 마셨어요.” 초등3학년인 김군의 눈동자는 벌써 초점을 잃은 듯 약간 흐릿하다. 말도 떠듬떠듬 이어진다. “그냥 동네형들이 하 는 거 따라 했어요. 본드를 맡으면 그냥 어지러워요. 학교도 가기 싫어요 .”
엄마가 발견하기까지 무려 3년 동안 김군의 몸과 마음은 시들어가고 있었 다. 미장원을 하는 홀어머니는 “혼자 내버려 두는 시간이 많아 나쁜 친 구나 형들하고 어울릴까 걱정도 했지만 어린애가 설마 본드까지 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환각작용 ‘러미나’ 거리서 쉽게 구입
진태원 청소년정신건강연구소장(신경정신과 전문의)은 “성인들은 한두가 지 약물만을 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청소년들은 이른 시간 내에 여러약물 을 사용한다”며 “지난 94년까지는 가스나 본드에 중독돼 병원을 찾아오 는 청소년 가운데 초등학생은 일년에 1∼2명 정도에 불과했으나 95년에는 한달에 1명, 96년에는 한달에 1.5명꼴로 부쩍 늘고 있다”고 말했다. 실 제로 서울보호관찰소 남부지소에서 약물상담을 의뢰한 청소년의 숫자는 지난 한햇동안 4백10명이었으나 올해 들어서는 1/4분기 동안 벌써 2백24 명에 이르고 있다. 이 가운데 14세 이하는 5명이다. 이들 청소년가운데 대부분은 술이나 담배 등 다른 약물을 중복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 다.
한번 약물에 중독되면 재발률도 매우 높다. 약물을 끊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밀알복지회 김봉혜 약물상담실장은 “약물에 한번 빠져들게 되면 70∼80%가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 약물을 사용하게 된다”고 밝혔 다.
이아무개(18)군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술과 담배를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때부터는 부탄가스에 처음 손을 댔다. 그러다가 중3 때 주위친구들 과 어울리다 가스 대신 본드를 ‘불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번꼴로 본 드 1∼2통을 마셨다. 본드가 없을 때는 니스로 대신했다. 또 섀시에 유리 창을 붙이는 데 쓰이는 접착제인 이른바 ‘토끼코크’도 사용했다. 중3때 학교를 자퇴한 이군은 95년 겨울 부산에서 진해제의 일종인 러미나라는 약을 먹기 시작했다. 1알에 1백원씩 몇만원어치를 한꺼번에 구입해 매일 20알 정도를 먹었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홍등가의 ‘삐끼 아줌마’들에게 서 2만원에 5백알 정도씩 구입했다.
이군은 지난해 2월 유해화학물질관리법 위반으로 보호관찰처분을 받은 뒤 이번에는 정말로 약물을 끊겠다고 마음먹었다. 수차례의 약물상담도 착실 히 받았다. 그러나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시 본드에 손을 대 2번째 보호관찰에 처해졌다. 그러나 유혹을 물리치기란 쉽지 않았다. 보호관찰 종료 한달을 앞두고 친구의 꾐을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 본드를 마시다가 경찰에 적발됐다. 이군은 이번에는 오는 98년 11월까지 2년간 보호관찰을 받아야 한다.
이군은 “본드를 끊으려고 몇번씩 다짐했지만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다.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는 내 자신이 정말 싫다”고 털어놨다. “여태껏 이 렇게 살아온 걸 생각하면 후회만 될 뿐이다. 저번처럼 쉽게 무너지지 않 기를 바라고 새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게 이군의 심경이다.
김 실장은 “약물 최초경험연령이 낮아지고 있는 만큼 초등학교 때부터의 철저한 예방교육이 절실하다”며 “우선 부모들이 약물에 대한 정확한 지 식을 갖고 자녀가 약물복용의 기미를 보일 때는 즉시 전문상담가나 병원 을 찾아 초기에 치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약물의 덫 피하기에는 보호막 태부족
‘유엔 아동·청소년 권리조약’은 33조에서 마약과 향정신성 물질의 불 법적 사용으로부터 아동을 보호하고 이러한 물질의 불법적 생산과 거래에 아동이 이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입법적, 행정적, 사회적, 교육적 조 치를 포함한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 에도 유해화학물질관리법, 마약법, 대마관리법, 향정신성의약품관리법, 미성년자보호법 등으로 약물남용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청소년 들은 마음만 먹으면 여전히 약물을 어렵지 않게 손에 넣을 수 있다. 법의 보호막 대신 약물의 덫에 노출돼 있는 것이다.
예방과 함께 치료 및 재활교육도 약물남용 근절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이 다. 권리조약은 ‘건강과 보건서비스’를 규정한 24조에서 기초건강관리 의 발전에 중점을 두면서 모든 아동에게 필요한 의료지원과 건강관리의 제공을 보장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약물남용으로 찌들어 가는 아이들을 치료하고 재활 교육을 실시하는 곳은 일부 국립정신병원과 몇몇 사설 병원 및 사회복지 관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진태원 원장은 “약물복용 청소년을 범죄자로 규정해 아무런 대책없이 학교에서 내쫓을 경우 또다른 범죄에 빠져 들기 쉽다”며 “이들에게 적절한 치료와 재활교육 및 학업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시설을 적어도 각도에 한 곳씩은 만들어야 한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