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읽기	1997년05월10일 제 156호

“환자는 의료인이다”

지난 4월26일(토)에 열린 대한의사협회 정기총회에서는 개정된 의사윤리 선언 낭독이 있었다. 윤리선언 낭독은 의협 총회에서 정례적으로 하는 일 이다. 하지만 이날의 낭독은 새로운 윤리선언이 채택되어 공식적으로 발 효한 것이라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언’이 말해주듯이 의사들은 고대시대부터 스스로 윤리 의식을 함양하고, 또 그것을 대외적으로 다짐하기 위해 윤리선언을 마련 하여 공포해 오고 있다. 그만큼 의업이 고도의 직업윤리를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일 터이다. 이번에 개정된 우리나라의 의사윤리선언은 특히 환자와의 관계에서 진일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관련되는 조항을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환자와 의사 관계를 이루기 위하여 최 선을 다함으로써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우리는 변화하는 사회상에 걸맞은 의료환경을 온 국민과 함께 추구함으로써 국민건강권과 의사의 진료권을 드높인다.”

환자를 동반자로 선언한 의료인들

이 조항이 뜻하는 바는 환자를 인격체로 대하여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 지하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의료문제의 해결에서 환자를 주체이자 의사의 동반자로 여기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어떤 의사윤리선언에서도 이만큼 환자와 국민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규정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실제로 우리나라 의사들이 앞으로 이러한 선언에 걸맞은 생각과 행동을 보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지만 선언 자체는 대단히 진보적인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하겠다.

오늘날 환자가 의사들에게 갖는 주된 불만은 의학지식이나 기술의 부족이 아닌 것 같다. 이는 환자들의 의식을 조사한 연구결과, 주변의 환자나 보 호자들이 토로하는 불만, 동료의사들의 경험담 등을 종합할 때 어렵지 않 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환자들은 의사들의 불친절하고 고압적인 태도 , 환자를 인간이 아닌 질병의 저장고로 보는 자세 등에 불만을 가지며 심 지어는 분노하는 것이리라.

그러면 왜 많은 환자들이 의사들에 대해 불만을 갖는 것일까? 의사들이 윤리적으로나 인간관계에서 특별히 문제점이 많은 사람들인가? 아니면 환 자들이 몸이 아프고 괴로워서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예민하 게 반응하는 것일까? 또는 의사에 대한 환자들의 지나친 기대에 기인하는 것일까?

모든 의사가 다 그러한 비난과 불만의 대상은 아니므로 개개 의사의 문제 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요인이 환자와 의사 사이의 관계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상 당 부분 현대의학의 특성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자- 의사 관계에 관련되는 현대의학의 성격을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 야만 불만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으며, 또 거기에서 진정한 해결 책도 마련될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환자와 의사의 관계가 오늘날처럼 왜곡된 데 대하여 흔히 지적하는 것이 의료의 상업화 또는 자본주의화이다. 의사나 병원이 환자를 이득을 취하 는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황금만능의 시대에 의료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업화에 대항하여 환자와 국민은 소비 자로서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과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다. 당연한 해석이며 타당한 대응이다. 그러나 그러한 분석만으로는 미흡한 데가 있 다.

주체적인 사람을 위한 과학적 의학

필자가 보기에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환자가 단순한 객체로 전락 했다는 측면이 있다. 서양에서 현대의학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1 9세기 이전까지 환자는 피동적으로 진료를 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의사와 거의 동등하게 자신의 진료에 참여하는 또하나의 의료인이었던 것이다. 의학이 자연과학의 세례를 받아 발전하고 또 그에 따라 환자에게 돌아오 는 혜택도 커졌지만 그에 반비례하여 환자의 자주성은 축소되었다. 환자 들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측면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스스로 과학과 의 학 앞에 피동적인 존재로 안주하게 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일 것이 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의 함의대로 스스로 건강 을 지키고 질병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현대의 ‘과학적 의학’ 은 진정으로 가치 있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황상익/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교수·대한의사학회 학술이사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