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1
1997년02월27일 제 146호 한겨레21

역시 검찰은 못 믿는다


(사진/고개 숙인 실세. 그러나 국민 대부분은 이들이 끝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왼쪽부터 홍인길, 황병태, 정재철, 김우석.)

한보 특혜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숱한 의혹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채 의혹 리스트에 새로운 의혹들만 추가시켰다.

이에 따라 특혜 사건 자체 못지않게 검찰 수사에 대해서도 비판의 여론이 높다. 검찰 수사를 ‘깃털수사’와 ‘해방 후 최대 사기극’으로 규정한 야당은 특별검사를 통한 재수사와 텔레비전 청문회를 촉구하고 나섰다. 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은 2월14일 “검찰 수사는 백주 대낮에 국민을 우 롱하는 속임수로 대통령을 둘러싼 권력 핵심부와 민주계 실세들은 모조리 빼주는 축소수사와 조작수사”라고 통박했다. 같은 날 자민련 안택수 대 변인도 “검찰이 결국 용두사미식 수사로 이 사건을 종결지으려는 흔적이 역력하다”며 “이른바 깃털과 그 범주의 인사만 구속시키고 마무리하려 는 것은 신한국당 정권의 양심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신랄한 어조로 공격했다. ‘한보 특혜 사건의 배후’를 넘어 ‘한보 특혜 사건 수사의 배후’가 정치쟁점으로 떠오른 것이다. 야당뿐 아니라 각계 원로들과 시 민단체들도 검찰 수사를 비판했다. 또 각 신문 독자투고란과 PC통신에도 검찰 수사를 질타하는 시민들의 반응이 쏟아졌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 검찰 수사가 한보 특혜 사건의 본질에 전혀 접근하 지 못했기 때문이다. 건국 이래 최대 금융 스캔들인 한보 특혜 사건의 본 질은 수서 비리의 전력이 있는 정태수씨에게 5조7천억원의 대출을 가능하 게 해준 배후가 누구며 또 대출금이 당진제철소 건설에 제대로 쓰였는지 그리고 이를 감시 감독해야 할 관계 당국의 책임은 없는지 등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검찰의 수사는 이러한 의혹들 가운데 어느 하나 속시원 히 파헤친 게 없다. 오히려 의혹만 증폭시켰다.

검찰 수사 가운데 의혹으로 남아 있는 점들을 다시 한번 짚어보기로 한다 .


1. 홍인길 의원이 배후의 실체인가?

검찰은 신한국당의 홍인길 황병태 정재철 의원이 한보 특혜 대출의 정치 권 커넥션이라고 밝혔다. 이들이 은행에 압력을 가해 한보에 대한 특혜 대출이 이뤄지도록 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3인중에서도 정태수 총회장으로부터 8억원을 받은 홍 의원을 핵심 으로 지목했다. 검찰은 “대출 외압을 홍인길 의원이 주도한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러니까 영장청구한 거 아니냐”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 홍 의원은 “왜 자꾸 나더러 실세라고 하나. 나는 바람에 날리는 깃 털에 불과하다. 나는 참모로서, 비서로서 묵묵히 열심히 일했을 뿐이다. 난 대단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고 항변했다. 이른바 ‘깃털론’ 이다. 즉 자기 선 이상의 실세가 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 것이다.

굳이 홍 의원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그가 배후의 실체라는 검찰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김영삼 대통령 취임 때부터 4�11총선 직전까지 청와 대 총무수석비서관을 지낸 그가 김영삼 대통령의 측근 중 하나인 것은 사 실이지만 천문학적 규모의 특혜 대출을 주도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라는 게 일반적 평가다. 또 구속영장에 나타난 홍 의원의 혐의 사실도 신빙성 이 떨어진다. 우선 홍 의원이 정태수 총회장으로부터 돈을 받고 은행에 대출을 청탁(검찰은 구속영장에서 ‘압력’이 아니라 ‘청탁’으로 표현 했다)한 시기가 그렇다. 홍 의원이 정태수 총회장으로부터 돈을 받고 대 출 청탁을 한 것은 96년 2월부터 12월까지다. 홍 의원은 4�11 총선 출마 를 위해 95년 12월 청와대를 떠났다. 결국 96년 2월 홍 의원은 총선 출마 예정자였을 뿐이다. 그런 그가 특혜 대출의 배후 실체란 말인가? 백보 양 보해 홍 의원이 배후라는 주장을 받아들여도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94년 과 95년 각각 1조원 이상씩 한보에 지원된 대출금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 나. 대출과 관련해 정태수 총회장으로부터 각각 2억원과 1억원을 받은 황 병태 의원과 정재철 의원도 그 수수 시점이 96년 10월과 95년 10월이다. 검찰은 이런 의문에 대해 “대출액이 많다고 해서 강한 외압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해명했다.

장막 뒤의 배후 실체는 과연 언제쯤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인가?


2. 대출금 5조7천억원의 행방은?

포항제철 위탁경영팀은 지금까지 5조원이 투자됐다는 한보철강 당진제철 소의 건설 비용은 3조원이면 충분했다는 평가를 내놨다. 다시 말해 2조원 상당이 낭비되거나 유용됐다는 얘기다. 과연 2조원은 어디로 갔을까? 그 러나 검찰은 이 부분에 대해 김종국 한보그룹 전 재정본부장의 1백52억원 횡령을 제외하고는 거의 밝혀낸 게 없다. 한보철강 부도 직후부터 정태수 총회장이 대출금의 상당부분을 위장계열사나 비자금으로 빼돌렸거나 제철 과 무관한 사업 확장에 유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는데도 말이다.


3. 김우석 장관만 책임지면 되는가?

당진제철소 건설은 정부의 각종 인·허가와 감시 감독을 거쳐야 했다. 은 행 대출부터 제철소 부지의 공유수면 매립, 매립 면적 확대, 코렉스공법 도입 허가 등등…. 다시 말해 한보 특혜 사건에서 재정경제원 은행감독원 통상산업부 건설교통부 등 관계당국들은 그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 다. 그러나 한보 특혜와 관련해 정부쪽 책임자로는 김우석 전 내무부장관 한명만이 구속됐다. 그것도 당진제철소와 국도를 연결하는 해안도로 건설 시기를 앞당겨준 거창한(?) 특혜에 대한 대가로 2억원을 받았다는 혐의다 . 검찰은 정부쪽 관계자들의 책임 문제에 대해 “현재 현직에서 떠나 있 어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수사과정을 살펴보면 검찰이 정부쪽 관계자들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수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는 인상이 짙다. 검찰은 대표적인 의혹의 대상이었던 박재윤 통산부 장관 도 비공개로 조사한 뒤 “위법한 행정 행위가 없었다”며 면죄부를 주었 다.


4. 산업은행은 책임이 없는가?

금융계 관계자들로는 우찬목 조흥은행장과 신광식 제일은행장 두명만이 각각 4억원씩 대출 커미션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그러나 금융권의 한 보 특혜 대출은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 산업은행이 대출 규모를 늘리기 시작하면서 본격화됐다. 산업은행은 대출 규모도 8천3백억원으로 은행장 이 구속된 조흥은행의 4천9백억원보다 2배 가까이 많다. 그럼에도 산업은 행의 이형구 전 총재와 김시형 총재는 검찰 조사 뒤 풀려났다. 이에 대해 국민회의는 “이형구 전 총재가 한보철강 대출비리와 관련해 핵심 실체의 이름을 거명하자 검찰이 이 전 총재를 풀어줬다는 정보를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5. 정보근 회장은 혐의가 없나?

한보그룹에서는 정태수 총회장과 김종국 전 재정본부장 두명만이 구속됐 다. 사건의 파장과 비교할 때 형사처벌 대상이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 정보근 회장의 책임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정 회장은 부친인 정 태수 총회장과 함께 정관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로비를 해온 것 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 회장은 수사 개시 14일이 지나서야 소환돼 조 사를 받고 풀려났다. 업계에서는 정 회장이 신변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한 보그룹 재건을 위해 활동했으며 검찰이 정 회장의 신변을 보장해주는 대 가로 정태수 총회장의 입을 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돌고 있다.


6. 갑작스런 부도는?

한보철강 부도 직후 제기된 의혹 가운데 하나가 부도처리 시점이었다. 한 보철강이 최종 부도처리된 것은 공식적으로 1월23일 오후 6시. 그러나 한 보철강은 이미 1월18일 사실상 부도처리됐으며 또 청와대가 지난해 12월 부터 이때까지 적극적으로 나서 부도를 막아주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런 상황에서 설 직전 갑자기 부도처리한 이유에 대해 의혹의 눈길이 쏠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검찰 수사는 이런 의혹을 풀어주지 못했다 .


7. 누가 수사 기밀을 흘렸는가?.

특급 기밀 사항인 정태수씨의 정치인 명단 진술 내용이 사실 확인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언론에 잇따라 공개됐다. 누군가 어떤 목적에서 의도적으 로 수사 기밀을 흘리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한보의 언론플레이’ ‘민주계 내 권력 암투설’ ‘신한국당 대선 후보 경쟁 관련설’ 등 각종 설이 난무했다. 특히 김덕룡 신한국당 의원이 ‘정치적 음모론’을 제기 하면서 검찰 수사가 각본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는 의혹마저 제기됐다. 이 에 따라 검찰도 수사 기밀 유출에 대해 조사에 나섰다고 밝혔지만 결국 확인하지는 못했다.

안재승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2월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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