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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희망의 사람들 |
1997년02월27일 제 1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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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오는 3월 고대문명전파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태평양을 항해하게 될 갈대뗏목.)
인류문명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황허·메소포타미아·인더스강·나일강 주변 등 각 대륙에서 발흥한 고대문명은 독자적으로 자생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한 문명이 다른 문명에 영향을 미쳐 순차적으로 일어난 것이었을 까.
불행히도 이 질문에 대해 만족스런 대답을 주는 사람은 없다. 어떤 이는 각 문명권이 독자적으로 발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른바 자생설이다. 그런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한뿌리로부터 나온 문명이 바다를 통해 각지 로 퍼져나갔다고 주장한다. 이를 전파설이라고 한다.
가능성만 믿고 대양으로 대양으로
지금 태평양 남동쪽 이스터섬엔 이런 논쟁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세계 각 지에서 17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이들이 지지하는 가설은 전파설. 이 스터섬 아나케나해변에 만들어져 있는 길이 20m짜리 갈대뗏목이 이들의 ‘도구’다. 스페인·이탈리아·일본인 등으로 구성된 이들은 오는 3월 말 이 뗏목을 타고 이스터섬을 떠난다. 해류와 바람에만 의존해 태평양 너머 일본에 도착하는 게 대략 오는 98년. 그뒤에도 2000년께까지 인도양 ~지중해~스페인~대서양을 거쳐 페루까지 지구를 거의 한 바퀴 돌 예정이 지만, 항해 완성일은 굳이 못박지 않고 있다. 바람과 해류가 사람이 세운 일정을 쉽게 지켜주진 않을 테니 말이다.
이런 긴 여행을 통해 이들이 말하려는 것은 “문명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전파됐다”는 것이다. 이들의 취지를 요약하면 이렇다.
“갈대와 통나무뗏목밖에 없었을 옛날에도 사람들은 이렇게 먼바다로 나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땅을 찾는 데 실패했 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이 여행길은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는 성공해 ‘선진문화’를 전달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가능성을 찾아 떠납니다.”
이들이 4~5년의 긴 항해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 인류는 고대문명들이 어떻 게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실마리 하나를 더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런데 이들은 왜 이스터섬을 출발점으로 택한 것일까? 거기에는 지난 40년 대부터 ‘뗏목항해’를 시작한 한 노학자의 영향이 컸다. 노르웨이 출신 의 인류학자 토르 헤이에르달(81)이 바로 그 사람이다.
헤이에르달은 이미 네차례 뗏목 항해를 시도했다. 그의 뗏목항해 일지는 지난 1947년 남미 페루에서 태평양 폴리네시아로의 여행에서부터 시작된 다. 그리고 그뒤 68, 69년에 아프리카 모로코에서 중남미 바르바도스로, 또 77년엔 이라크 티그리스강에서 아프리카 지부티까지 항해했다. 그의 이런 목숨을 건 항해 역시 인류문명의 전파경로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 다. 그는 이를 위해 태평양·대서양·인도양 등의 대해 위를 고대인들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갈대뗏목(또는 발사통나무 뗏목)으로, 또 고대인들의 항해방식 즉 오로지 바람과 해류에만 의지하는 방식으로 항해했다. 그런 그가 이스터섬을 찾은 것이 1955년이었다.
백인을 닮은 이스터섬의 석상
그는 이스터섬의 거대석상 모아이가 백인의 형상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남태평양의 섬에 남아있는 백인형상의 거대석상은 바로 그가 주창하는 문 명전파설의 산 증거일 수 있다고 헤이에르달은 본 것이다.
이스터섬에서 3월 말 대항해를 준비하는 이들은 바로 이런 ‘헤이에르달 사상’의 실천자들인 것이다. 이것은 이들이 이번 항해에서 헤이에르달의 ‘원칙’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데서도 확인된다. ‘헤이에르달 항해원칙 ’이란 첫째 배에 타는 사람은 가능한 다국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각 분 야의 전문가들 중에서 선발하다 보면 다국적이 될 수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이 작업이 ‘인류공동’의 문화유산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번 3월 말 항해가 스페인인 선장을 비롯해 볼리비아·이탈리아·일본 등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이루진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두번째는 유엔사 무국의 허락을 받아 배에 항상 유엔 깃발을 단다는 것이다. 이것은 항해 때 닥치게 될 위험에 대비한다는 의미와 함께 ‘평화’를 상징하고 있다. 세번째는 항해과정은 물론 그 준비과정을 충실히 기록해둔다는 것이다. 일기형식의 서면기록은 물론 사진기록, 나아가 기록영화도 찍어둔다. 인 류문화 유산에 대한 기록을 위한 것이라는 이 원칙도 항해자들은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헤이에르달은 어떻게 해서 문명전파에 관심을 가진 것일까 . 그가 뗏목항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에 의해서였다. 자연 경관이 뛰어난 노르웨이의 시골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헤이에르달은 자연 에 대해 유달리 관심이 많았고 오슬로대학에 진학해서는 동물학을 전공했 다. 그러나 그는 곧 전공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고자 한다. 좀더 넓은 시야 에서 세상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식물학·해양학·인류학 등 인접학문을 접하게 됐고, 이때 대학도서관 인류학 특별코너에서 남태평양 폴리네시아 에 관한 책을 읽게 된다. 그는 “폴리네시아야말로 인류학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곳”이라 확신하고 그곳을 답사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 계획은 1937년 결혼과 함께 실행에 옮겨진다. 부인 리브 토르프와 함께 신혼을 폴리네시아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폴리네시아 마르케사스군도에 머물고 있던 어느날 그는 한 노인이 “티키 티키”하면서 노래부르는 것을 듣게 된다. 호기심이 동한 그는 그 노인에 게 티키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등을 묻는다. 노인은 그의 조상들을 바다 건너 이곳으로 데리고 왔던 신왕(神王)이 바로 티키(콘티키)이며 동 쪽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그때까지는 폴리네시아인의 조상은 서쪽에서 건 너왔다는 것이 거의 정설이었다. “동쪽이라면 그건 아메리카대륙이고 굉 장히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가. 그러나 노인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
그것이 그의 일생을 바꾸어 놓았다. 헤이에르달은 그때부터 콘티키의 추 적에 나섰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46년 그는 옛날 항해방식에 따 라 에콰도르 밀림에서 발사통나무를 구해 뗏목을 만든 다음, 47년 4월 페 루의 해군기지 카이요항을 출발해 1백1일 만에 폴리네시아의 마르케사스 군도에 도착했다. 콘티키 일행이 바람과 해류만을 이용해 폴리네시아까지 올 수 있었음을 증명해보였다. 그때 그의 나이 33살이었다.
그는 이어 55년에 남태평양상의 절해고도 이스터섬을 찾았다. 현지주민들 은 라파누이라 부르는 이 섬이 이스터섬으로 통칭되는 것은 1722년 이 섬 의 존재를 서방세계에 알린 네덜란드 야곱 로게베 선장이 이 섬을 발견한 날이 마침 부활절(이스터)이었기 때문이다. 헤이에르달은 특히 거대 석상 모아이에 주목했다. 모아이가 바로 콘티키의 형상을 닮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모아이는 이마는 앞으로 튀어나왔고 매부리코에다 입술은 얇고 입은 꼭 다물고 있으며 턱은 수염을 길러 길다. 영락없이 백인의 형상이 다. 그는 이스터섬에서 모아이의 제작배경, 제작과정, 운반 및 설치과정 등을 조사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가설을 실험을 통해 확인해나갔다.
1968년 이집트문명의 아메리카 전파 가능 입증
(사진/백인의 얼굴을 닮았다는 이스터섬의 석상 모아이와 함께한 헤이에르달. 모아이에는 배그림이 새겨져 있다.
문명전파에 대한 그의 믿음은 그뒤 그의 발걸음을 이집트로 항하게 했다. 이집트 문명의 아메리카 전파 가능성을 실험해보기 위해서다. 지난 68년 이었다. 그는 아프리카 차드의 호수에서 갈대배를 만드는 사람들을 이집 트로 불러 나일강의 갈대로 갈대뗏목을 만들었다. 배의 구조와 형태는 옛 이집트 고분벽화에서 힌트를 얻었다. 배의 이름은 ‘라’. 고대 이집트 왕국의 주신(主神)이며 태양신의 이름이다. 제작된 배는 모로코로 이송돼 거기서 대서양을 건너 카리브해의 바베이도스로 향했다. 그는 비록 그해 바베이도스에 도착하는 데 실패했지만 이듬해 똑같은 방식으로 재차 시도 해 성공한다. 성공한 배 이름은 ‘라2호’였다. 이집트 문명의 아메리카 대륙 전파 가능성을 입증해보였던 것이다.
헤이에르달은 그뒤 지난 77년 이라크의 우르를 출발해 티그리스강을 따라 걸프만으로 내려간 뒤 아프리카의 지부티에 이르는 장장 4천마일에 걸친 해상루트를 답사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뗏목항해를 매우 무모한 계획 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항해와 답사과정을 통해 원시 적 뗏목만으로도 대양을 훌륭히 건널 수 있음을 증명했으며 또 곳곳에서 문명전파의 흔적들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말한다.
“충분한 고증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라 성공을 확신했습니다.”
페루의 카이요항을 출발해 뗏목항해의 신기원을 이룩한 지 어언 40년. 그 동안 헤이에르달은 세계 곳곳의 문명발상지를 찾았고 또 3대양을 항해했 다. 이제 그는 다시 그가 처음으로 돛을 올렸던 페루로 되돌아왔다. 지난 88년부터 헤이에르달은 페루 북부해안지대 ‘피라미드기슭’에서 발굴작 업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페루 북부해안지대는 일찍이 문화가 꽃폈던 곳 으로 최근의 발굴 결과 귀중한 문화재들이 대량 출토돼 세계 고고학계를 흥분시키기도 했던 유명한 곳이다. 비록 항해는 아니지만 그의 생애 마지 막 사업이 될 이 발굴작업 역시 ‘문명전파설’에 대한 그의 꿈이 담겨 있다.
“이곳 왕묘에서 출토된 왕의 황금마스크와 부장품에선 칠레에서만 나는 보석과 아르헨티나에서만 채취되는 녹색 터키석 장식이 나왔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것들을 구하기 위해 먼 곳을 찾아다녔을 텐데 육로가 아 니라 해로를 이용했을 겁니다. 또 투쿠메는 해안에서 20km 내륙에 있긴 하나 곳곳에 조개껍질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옛날에는 해안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죠. 이런 생각이 미치자, 이곳에서 내가 찾고자 하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던 겁니다.”
그의 발굴작업은 페루 문화재관리국의 주관 아래 노르웨이 오슬로의 콘티 키박물관이 돈을 대는 형식으로 시작됐다. 오슬로박물관이 ‘콘티키박물 관’으로 된 것은 그의 1947년 콘티키호 항해가 인류학에 어느 정도의 영 향을 남겼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 또한 아예 ‘콘티키맨’으로 불리 기도 한다.
“이곳에다 거대한 피라미드를 축조한 잉카 이전 고대문명은 중앙아메리 카와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인더스, 나아가서는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 를 서로 연결해주는 고리의 구실을 해줄 것이라 믿고 있죠.”
그의 투쿠메에 대한 이런 집착은 이미 몇개의 유물 발굴로 힘을 얻고 있 다. 하나는 나무로 된 고대의 노를 발견한 것이고, 또하나는 흙벽돌 벽에 뗏목 그림이 선명하게 새겨진 부조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깊은 내륙에서 도 ‘문명과 바다’ ‘문명과 배’에 대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바다와 문명’은 영원한 숙제
투쿠메에 있는 ‘카사 콘티키(콘티키의 집)’가 피라미드와 같은 흙벽돌 로 지어졌다는 것도 인류 문명에 대한 그의 고집스러움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사례다. 매우 검소한 책상, 의자 정도가 가구의 전부인 카사 콘 티키에 장식이라면 현관쪽에 진열돼 있는 말타기 도구 정도일 것이다. 그 는 말타기를 좋아하지만 말을 타되 절대 달리지 않고 항상 걷는 속도를 유지한다고 했다. 생각하기 위해서이다. 아마도 ‘바다와 문명’에 대한 생각일 것이다.
오늘도 카사 콘티키의 넓은 뜰 한쪽에선 바람개비가 쉬지 않고 돌고 있다 . 지하수를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바람개비는 80이 넘은 고령에도 문명탐사를 계속하고 있는 헤이에르달의 지칠 줄 모르는 탐구정 신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이런 정신은 오는 3월 말 항해에서와 같이 뜻있는 후학들에 의해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투쿠메(페루)=권삼윤/ 자유기고가
© 한겨레신문사 1997년02월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