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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문학 |
1997년02월27일 제 1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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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0만파운드라는 거금을 들여 건립한 셸리의 시비는 우주 한복판에 혹성이 떠있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겨울이 오면 봄 또한 멀지 않으리!’ 고난 속에서 힘겨워하는 세상 모 든 이들에게 삶의 끈질긴 밧줄을 놓지 말라고 격려해주는 이 고전적 메시 지는 바로 잉글랜드의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인 퍼시 비시 셸리(1792~1822 )의 장시 <서풍의 노래>의 한 구절이다. 당시 기성사회의 온갖 편견과 장 벽에 도전하다 서른살의 짧은 생애를 마친 이 반항적 시인을 기리는 시비 가 최근 그의 고향 마을인 잉글랜드 남부 서섹스의 호셤에 세워졌다.
사후 1백70년 만에 호셤의 아들로 환생
셸리 시비의 건립이 주는 의미는 단순히 후세인들이 시인이 태어난 고향 을 자랑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모든 가치에 앞서 인간애를 가장 고귀 하게 여겼던 시인 셸리의 정신, 그의 열정적인 반항과 변혁의 정신이 그 가 죽은 지 1백70여년이 지난 오늘날 비로소 고향 후손들에게 스며들고 있다는 커다란 징표인 것이다. 잉글랜드에서도 호셤지방은 예로부터 보수 적 전통의 뿌리가 매우 깊은 곳으로 지금도 정치, 사회적으로 영국식 복 고주의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고장이다. 이러한 호셤에서조차 드디어 문 화적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인가? 이탈리아의 외딴 바닷가에서 뱃 놀이 도중 익사한 안타까운 한평생이었지만 주옥같이 빛나는 시로 영문학 계에서 큰 자리를 차지한 셸리를 객지 사람들이 입을 모아 사랑할 때에도 고향사람들은 좀처럼 ‘우리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서야 그의 정신을 기리는 시비를 호셤타운의 한복판에 세움으로써 보수적인 동향인들과 혈기방장했던 이 반항아의 화해가 이뤄 진 것이다. 호셤 주민들의 이같은 태도 변화는 영국 문단뿐만 아니라 진 보진영의 모든 문화계, 그리고 일반 사회인 사이에서도 놀랍게 받아들여 지고 있다. 애초부터 셸리는 호셤의 정기와 인연이 맞지 않았다. 18세기 말 그 엄중한 왕정과 종교가 전통사회에 군림하고 있을 무렵 그는 정통 귀족가문의 귀공자로 태어났다. 당시 호셤지역의 국회의원이었던 셸리의 부친 티모시 셸리 경은 매우 엄격한 종교적 분위기로 아들을 키웠다.
이튼칼리지를 거쳐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하였지만 천성적으로 자유주의를 타고난 셸리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교육방식이었다. 부친의 비타협적인 교육관은 그의 반항적 기질을 더욱 부채질할 뿐이었다. 창작에 눈을 뜬 셸리는 시라는 강력한 문학적 수단을 통해 인간성을 억누른다고 그가 여 겼던 종교와 모든 사회관습에 대해 정면으로 반발한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외치며 종교는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 유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정한 그는 ‘무신론의 필요성’이라는 팸플릿을 만들어 옥스 퍼드에 배포하려다 제적당하는 등 당시의 기준으로는 혁명에 가까울 정도 로 용감무쌍하게 기성사회를 철저히 부정했다. 과격한 무신론자, 반왕정 공화주의를 자처하고 나선 그의 시 속에서 사회의 기존질서를 전면 개혁 하라는 요구가 끓어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작년 11월에 있었던 시비의 제막식에는 셸리가 생을 마감했던 이탈리아의 도시 레리의 시장 조르지오 테돌디도 참석해서 시선을 끌었다. 테돌디 시 장이 “셸리처럼 용감한 시비”라고 칭송한 이 기념물은 그 자체로도 셸 리만큼이나 논란을 불러 모으고 있어 또한 화제다. ‘솟구치는 우주’라 는 주제를 표방하고 있는 이 조각물은 마치 우주 한복판에 혹성이 떠있는 듯한 느낌을 주며 매우 포스트모던한 개념으로 제작되었다.
여류조각가 안젤라 코너가 창조한 이 시비는 10만파운드라는 거금이 들었 으며 무게 4.5t, 높이 8.5m로 가운데의 큰 구체 1개와 그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동일한 구체 4개로 이뤄져 있다. 작은 구는 각각 작은 수반의 물 위에 떠있고 중심의 큰 구형은 15분 간격으로 아래쪽으로 물이 흘러내리 면서 상하운동을 하고 있어 기념비란 고정된 조형물이라는 이제까지의 고 정관념을 완전히 깨뜨렸다. 이 파격적인 기념비 앞에 놓인 판석에는 ‘우 주의 영원함은 우리 마음을 타고 내린다. 빠른 물살로…’라는 셸리의 시 <몽블랑>의 시구가 새겨져 있다. 쉼없이 흐르는 물줄기의 속삭임으로 셸 리는 지금도 자신의 열정을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셸리는 우리의 자랑스런 아들이지요. 반항적 기질이 있는 것도 마음에 듭니다.” 시비를 보러 일부러 나와보았다는 이 지역 주민 해리 피어슬(7 9)은 멋진 시비가 좋긴 하지만 건립에 돈을 너무 많이 들였다면서 “차라 리 그 돈으로 노숙자들을 도와줬더라면 셸리가 더 기뻐했을 것”이라고 자신의 소감을 피력했다. 호셤 지방의회의 로리 파네우스 대변인에 따르 면 자신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주민들이 훨씬 더 셸리의 시비건립을 환영 해서 오히려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이 고장 사람들이 셸리와 친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그의 생가가 어디인지를 묻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는 주민을 만나기 힘들었다. 사실 이번 시비건립에 앞서 셸리를 기리고자 하는 움직 임이 과거에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의 사후 백년되던 해 셸리기념박물관 건립안이 나오자 주민들이 대대적으로 반발하고 나서 결국 무산되고 말았 던 역사도 있다. 당시 문호 조지 버나드 쇼는 “골수 보수주의의 땅에 셸 리에 대한 적개심 이외의 다른 감정을 불어넣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셸 리가 무엇을 썼는지 이해하는 사람만이 알 것”이라며 이 위대한 이단아 를 내치는 사람들의 무지를 개탄한 바 있다.
이단아를 위한 막대한 건립기금에 반감도
이번 시비의 건립기금은 영국에서 제일 큰 슈퍼마켓 체인 ‘세인즈베리’ 에서 내놓았고 셸리를 기리는 추모예배가 이 지역 교회에서 열렸다. 채식 주의자이기도 했던 셸리가 그토록 싫어했던 상업주의와 종교가 앞장서서 셸리를 되살린 셈이 되었지만 이런 역설에 마음을 쓰는 후손들은 그다지 많은 것 같지 않다.
“오! 나를 들어올려주오./ 파도처럼, 나뭇잎처럼, 구름처럼!/ 나 생명의 가시 위에서 쓰러지네!/ 나 피흘리네!”(‘서풍의 노래’ 중). 셸리는 인 류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젊음을 소진하는 데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생애는 너무나 짧았고 고향이 그를 이해하는 데에는 너무나 오랜 시 간이 걸렸지만 이제 이 ‘파괴자이자 건설자’였던 그의 정신은 이 용감 한 시비 위에서 퍼져나가 후손들을 둘러쌀 것이다.
호셤=권은정 통신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2월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