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재에서
1997년02월27일 제 146호 한겨레21

한보와 황장엽, 따로가 아니다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주인공 라비크가 사랑하는 연인 조앙 마듀를 수술하는 장면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수술 한 뒤 벌어지는 사태다. 수술 부위를 개복한 뒤 이미 때를 놓친 것을 안 주인공은 포기한 채 그대로 봉합하고 만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데도 사 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는 것이리라.

노동법·안기부법 개악 파동으로부터 한보사태를 거쳐 황장엽 비서 망명 과 이한영 피격에 이르는 1997년 벽두 우리 사회의 주요사건을 보면 자꾸 개복수술이 생각난다. 다른 것이 있다면 라비크는 사랑하면서도 그랬다는 것이고, 우리의 경우는 오히려 주동자랄까 해석자들이 이 사회를 얼마나 덜 사랑하는지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때가 늦지 않았는데도 기 회만 나면 얼씨구나 수술을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노동법·안기부법은 어떻게 한보사태라는 것으로 뒤덮여갔는가. 그 한보 사태라는 것은 또 어떻게 황장엽 망명사건으로 뒤덮여가고 있는가. 하나 하나 우리 사회를 뿌리부터 흔들 만한 이 사안들은 그렇게 철저하게 발본 적 수술이나 해결책을 포기한 채 봉합되고 봉합돼가고 있다.

노동법·안기부법-한보사태-황장엽 망명은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 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그렇게 유기적으로 서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 는 것이다.

이미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충분히 알고 있는 북한의 참상이 한보사태와 전혀 관련이 없을까? 아니다. 한보의 불투명하고 비경제적인 사업을 위해 쏟아부은 5조원의 돈을 만일 남북의 미래 통일공동체를 위해 ‘투자’했 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보자. 세상을 바꿀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 런 ‘투자’가 현재의 북한체제를 그대로 강고화시키고 남북 사이의 경쟁 을 격화시키는 쪽으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그렇다.

한 1조~2조원 정도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 문제 많은 북한의 다락밭을 콘 크리트와 뗏장을 이용해 제대로 된 배수로와 계단으로 경지정리하는 게. 거기다 북한의 토양에 맞는 다수확 내한성 종자와 비료, 그리고 북한의 기후형태에 맞는 비닐하우스를 대대적으로 보급하는 데는 다시 1조원 정 도면 되지 않을까? 현재 북한의 산업생산시설에 수출용 상품을 대량생산 하는 시설을 결합시킨 모델을 갖가지로 개발한 뒤 에너지와 원자재를 공 급해 궤도에 올려놓는 데 다시 2조원 정도를 쓴다면… 아아, 세상은 바뀔 것이리라.

황장엽의 ‘서신’이라는 걸로 다시 안기부법의 정당성을 대대적으로 홍 보하려는 지금 노동법·안기부법-한보사태-황장엽 망명은 결코 따로따로 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2월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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