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1997년02월27일 제 146호
|
|---|
(사진/"평양으로 돌려보내라." 북한은 "황 비서는 납치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황장엽 노동당 비서는 과연 서울 땅을 밟을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판 단하기가 극히 불투명하다. 황 비서가 망명을 중국에서 신청했기 때문이 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따라서 현재로서 그가 서울에 올 수 있을지는 중국의 결심에 달려 있다는 것이 전문가의 대체적인 시각 이다.
중국 최대의 딜레마
그러나 남북한 등거리 외교로 실리를 챙겨온 중국으로서는 지난 92년 한- 중수교 뒤 최대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더구나 중국은 북한체제의 붕괴를 막기 위해 올해부터 향후 3~5년간 대북 정치-경제관계를 대폭 강화하는 한편, 중장기적으로 21세기 아·태지역내에서 미-일로부터의 안보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한국과 외교-안보 분야의 전략적 동반관계를 구축하겠다는 야심찬 구상을 내부적으로 하고 있던 참이다. 더구나 ‘하나의 중국’원 칙을 고수해 온 중국은 최근 북-대만간의 긴밀한 접근을 눈엣가시로 느껴 오던 터다. 대만이 막강한 외화보유고를 밑천으로 북한을 회유, 중국을 자극해 왔기 때문이다. 핵폐기물의 북한수출, 대표부 교환설치, 곡물 지 원 등 대북 경제원조를 미끼로 북한에 다가가는 대만의 행태에 분노해온 중국으로서 이번 황비서의 망명 처리 결과에 따라 전혀 예상못했던 악재 를 만들 가능성도 있다.
중국이 북한의 입장을 충분히 헤아리지 않고 황 비서를 남쪽에 인도한다 면 북한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북한이 ‘하나의 중국 원칙 흔들기’에 나설 것은 뻔하다고 중국은 판단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가뜩이나 빠른 속도로 미국에 접근하고 있는 북한이 독자적인 행보를 더욱 가속시켜 나 갈 경우 중국으로서는 한반도 정책을 수행하는 데 심각한 차질을 불러올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은 이제까지 중국에서 우리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한 북한인들은 중국 과 북한의 관계를 고려해 홍콩으로 보낸 뒤 여기서 국제난민 처리 절차를 거쳐 한국으로 보내 왔다. 북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한 것이다. 일 반 망명자의 경우도 이럴진대 황 비서처럼 양국의 정치관계를 치명적으로 손상시킬 수도 있는 거물급 인사를 과연 중국이 쉽게 한국으로 인도할지 확신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고 중국이 북한 손을 들어 주기에도 어려운 듯하다. 무엇보다 황 비서 자신이 서울행을 고집하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국제여론도 외면하 기 어려운 상황이다. 가뜩이나 중국내 인권문제로 국제여론에 시달려 온 상황에서 황 비서의 신병처리를 자의적으로 처리할 경우 얻는 것보다 잃 을 것이 많으리라는 판단 때문이다.
이미 미국은 지난 2월14일(현지시각) 마이크 매커리 백악관 대변인을 통 해 “이번 사건은 정치적 망명에 관한 국제규범에 따라야 한다”고 밝혔 다. 지난 54년 체결된 ‘난민 지위에 관한 빈 협약’엔 “난민을 생명이 나 자유가 위협받는 곳으로 추방하거나 송환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망명사건이 일어나면 주재국은 우선 유엔고등난민판무관실 의 관계자를 입회시켜 망명인의 의사를 확인한 뒤 그의 희망에 따라 신병 을 처리하는 게 보통이다. 이는 한국 정부의 입장과 일치한다. 한국 정부 도 황 비서의 망명신청을 일찌감치 공개해 이번 사건을 객관적인 망명사 건으로 확인시켜 국제여론을 유도함으로써, 중국 정부의 자의적 처리를 막으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은 한국 정부가 주장하고 있는 인도주의적 원칙과 국제법 절차에 따른 요구를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설 수도
(사진/황장엽 비서가 서울에 올 수 있는가는 중국의 결심에 달려 있다. 황 비서 망명과 관련하여 기자회견하는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
더구나 중국은 한국 정부가 황의 망명사실을 구체적인 협의없이 언론에 전격적으로 흘려 중국 정부의 선택여지를 없애버린 것을 매우 불쾌해 하 던 터이다.
중국의 첸치천 외교부장은 2월14일 싱가포르에서 가진 유종하 외무장관과 의 회담에서 “남북한 쌍방의 냉정하고 조용한 접근”을 주문해 한국 정 부를 주춤하게 만든 것은 중국 정부의 이러한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베이징에서의 남북한간 외교전도 결사적이다. 현재 베이징에서는 남한쪽에서 정종욱 주중대사와 서울에서 급파된 김하중 외무장관 특보, 문봉주 공사 등이 협상채널로 나서고 있고, 북한쪽에서는 주창준 주중대 사 등 대사관팀 외에 허정연 노동당 서기처 조직부부장을 비롯한 20여명 의 대표단이 14일 열차편으로 들어온데 이어 15일에는 6명의 관리들이 베 이징에 도착했다. 베이징 구공항을 통해 또다른 대표단이 속속 들어간 것 으로 전해진다.
남북한 양쪽은 황 비서의 망명 이후 중국과의 비공식 접촉을 통해 각각의 입장을 전달해 놓은 상태다. 15일 남북한 양쪽은 중국의 고위 당국자들과 경쟁적으로 만났다. 한국의 정종욱 대사 등은 중국 외교부의 한반도 담당 자인 당가선 부부장을 만나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황 비서의 자유의사 가 확인된 만큼 국제관례에 따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대해 중국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 해 시간이 필요하다”는 기존의 소극적인 입장을 되풀이한 것으로 관계자 는 밝혔다.
같은 날 북한쪽도 당 부부장과의 긴밀한 협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북 한은 “황 비서는 납치된 것이다”며 황 비서를 평양으로 되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했고 중국쪽은 한국쪽에 통보한 바와 같이 “시간을 달라”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외무부 당국자는 전했다. 중국이 단 기간내에 이 문 제를 처리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시간을 갖고 중국 정부가 취할 다음 수순은 무엇일까? 우선 중국 정부는 남북한 양쪽을 설득시키는 명분찾기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남북한 당 사자간의 직접적인 정치협상까지 고려하고 있는 듯하다. 중국 정부는 그 성사여부를 떠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명분을 쌓으면서 발을 뺄 수 있는 기회를 엿볼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남북간의 직접협상이 여의치 않을 경우 중국 정부는 ‘황 비서의 제3국행 ’을 고려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이는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한반 도 문제의 관련 당사국인 미국의 개입이 불가피해 질 것이라는 의견이 유 력하게 떠오르고 있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미 황장엽의 미국 체류방안이 떠오르고 있고 중국 고위당국자와 베이징 주재 미 중앙정보국(CIA) 책임자가 황 비서를 만나 망명의사를 확인했다 는 외신보도가 흘러 나오고 있다. 우리 정부의 일각에서도 미국이 황 비 서의 정보가치를 고려해 황 비서의 미국행을 성사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오는 22일부터 시작되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부 장관의 한국, 중국, 일본 3국 연쇄 방문이 황 비서 망명사건의 결정적인 고비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남-북, 북-미간 정치적 타협의 사항
황 비서의 미국행 가능성이 설득력을 더해주는 것은 평소 황 비서가 중국 못지 않게 미국에 많은 ‘지인’을 두고 있으며 남북한 당사자 모두에게 냉각기를 갖게 해 ‘돌발적인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차선의 조처로 떠오 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우리 정부도 지난 15일 정종욱 주중대사가 당 가선 중국 외교부 부부장과의 회담을 통해 “황 비서의 직접적인 한국행 이 어렵다면 제3국을 ‘경유’하는 방안도 검토해 달라”고 요청한 상태 다.
황 비서의 미국행도 영구체류가 될 것인가, 아니면 잠시 체류 뒤 서울행 으로 이어질 것인가. 현재로서의 전망은 불투명하다. 황 비서 개인의 의 사를 최대한 존중하더라도 본인의 서울행은 남-북관계, 북-미관계 등 또 다른 복잡한 변수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타협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래서 일부 전문가 사이에서는 “황 비서가 북한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고 뇌의 깊이만큼 그의 향후 행보도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섣부른 전망조 차 나오고 있다.
임을출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2월27일